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기름은 별로 권위가 없고 그냥 소비재이지만, 고대부터 기름을 머리에 부음 받는 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성경에서도 왕,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 이 세 종류의 신분만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히브리어로 하면 <메시아>가 된다. 아마 이것을 지금의 말로 바꾸면 영웅이 되지 않을까 싶다. 즉,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기만의 영웅이 다 있다. 더 정확히는 자기가 되고 싶은 영웅이 있다. 슈퍼맨 같은 능력을 소망하는 사람에게는 영웅이 슈퍼맨일 것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카사노바가 영웅일 수도 있겠다. 





또 어떤 사상 아래서는 히틀러가 영웅이라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아직 독일에는 일부 있는 듯) 그렇듯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바라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존재, 혹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를 다 소망하는데, 그 종류는 모든 사람이 다르지만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동일하다. 그렇게 사람 마음에 소망되는 모든 영웅들을 총칭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옛날 유대인들에게도 전 민족적인 소망으로 바라던 메시야가 있었는데, 난데없이 목수의 아들이 돌아다니면서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하니 정말 어이없고, 예수님보다 세상 열심히 살아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밤낮 수고하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한마디로 생뚱맞은 그런 존재였을 뿐이었다.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는데 3년이 걸렸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알고 보면 그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정말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인 자기의 정체성에 뭔가가 더해질 때 그리스도나 영웅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더해지는 그 무엇이 바로 선한 것이며, 의로운 것이라 여긴다. 그게 바로 선악과이기도 하다.(선악과에 대하여는 다음에 포스팅하기로 하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서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 <너>가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다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나도 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유가 너를 보니 하나님의 뜻을 알겠고, 너를 보니 예수 믿고 싶고, 나도 너의 성품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가장 먼저 첫 열매가 되신 분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굳이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the Christ가 되는 것이다. 그 분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은 사실 별거 아닐 수 있다. 


그 사건을 보며 나도 그분과 같은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고 여길 수 없다면 그게 뭔 상관이겠는가?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은  나도 그리스도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지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보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인데 그게 뭐 놀라운 일이겠는가 말이다. 그게 놀라운 일이 되려면 나도 그렇게 되어야 그게 놀라운 것이 아니겠는가? 전교 1등이 서울대 가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것을 보고 나도 열심히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에바브라라는 한 사람을 골로새의 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또 사도로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와 동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빌 2:6~8) 이 땅에 오시되, 위대한 영웅이 아니라 목수의 아들로 오셔서, 그런 평범한 사람이 그리스도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이심으로 그것을 믿는 모든 이들은 다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a Christ)로 살 수 있다는 그것을 전하기 위하심 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예수가 초라해서 죽여 버렸듯, 에바브라 역시 바울에게 받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세상적인 지식과 철학이 부족하다고 외면 받는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은 것이 되는 것이기에 바울 사도는 에바브라를 골로새 교회 앞에 온전히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큰 교회들이 목사를 청빙할 때 약(이)력을 보지, 신앙고백을 보지 않는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큰 교회가 바라보는 그리스도와 목자가 교인들이 닮고 싶고, 그 사람이면 정말로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얼마나 공부를 했고 얼마나 경력이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들의 메시야 관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 어떤 것이 더 더해졌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목사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져서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발가벗겨지셨다는 것이 뭔지 아는가? 그것은 인간 본연의 정체성 외에 겉옷처럼 치장된 사람의 모든 요소 학력이나 경력 재력 같은 모든 옷을 벗은 모습이 그리스도시라는 뜻이다. 


그런 신앙고백이 있는 사람,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그 사람을 볼 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듯 하나님의 아들로 보이는 그런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그리스도는 소유와 능력의 위대함을 좇기에 바알과 아세라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그리스도로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모습 그대로 살아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에바브라가 비록 세상적인 지식이 전문가들에 비하여 부족하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세상 것을 전혀 더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믿는 믿음으로 성도를 사랑하는 그것으로 그를 그리스도와 같이 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듯 오늘을 사는 우리도 사람에게 뭔가 더해져서, 신학을 해야 목사고, 방언을 해야 성령 받았고, 금식을 해야 신앙이 좋고, 성경을 수십 번 읽어야 그리스도를 잘 안다고 여기는 그 소유와 행위의 신앙을 버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때로 부인하고 싶은 인생을 사는 초라해 보일지 모르는 인간 그 본연의 모습만으로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좇아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신앙 안에서의 형제들을 서로 주로 받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함을 골로새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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