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은 옥중에서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냄에 있어 <신실한 형제들에게>라고 표현하고 있다. 신실하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로 믿음을 의미하는 피스티스(πιστις (pi'stis)의 형용사형인 pistos(faithful)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충성스러운' 혹은 '신뢰할 만한'이라는 뜻이다. Pi'stis와 Pistos는 아래 도식에서 보는바와 같이 같은 어원이나 믿음의 방향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믿습니다!!"하면 혓바닥 갈라지는 소리로 기도하거나 신념을 가진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의지와 열정으로 믿을 것을 강요하지만,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상태>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절대적으로 수동적인 것이다. 이것을 신앙 안에서는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다. '믿는다.'가 아니라 '믿어진다.'나 '과연 그러합니다!'라는 고백적인 표현들이 진정한 믿음에 대한 표현인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이러한 관계에서 피조물이 가지는 어떤 의지가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정말 그 창조자를 경외한다면 있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작금의 큰 교회들은 믿음을 강요한다. 그것은 그렇게 강요하지 않으면 믿을만한 것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등을 떠밀고 교회에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믿어지는 그런 것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자. 아들은 결코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된 과정을 본 적이 없다. 그냥 믿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믿으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것이 바로 절대적인 수동이고 순종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렇듯 믿는 믿음이 바로 믿음이지, 소나무 붙잡고 뽑을 기세로 "주여! 믿~습니다!!" 외친다고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믿음이라면, '뱃속의 아기가 아들인 줄 믿습니다.' 했다가 설사 딸이 나오더라도 그 아기가 아들로 바뀐다고 믿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 진실로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것이며 그 믿음 안에서,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신실한(Pistos) 형제>라 한 것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을 대함에 있어 그런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관계라는 것이다. 이는 골로새 교인들이 '바울이 사도임을 믿습니다!' 하면서 자신의 세뇌시켜가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말하는 것이라면 의지를 가지고 믿으려 하지 않아도 다 수용될 수 있고, 순종되고, 설득 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편지는 그런 형제들에게 전하는 편지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믿~습니다"라는 의지로 믿으려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편지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는 바울과 골로새 교회의 신실한 형제들이라는 관계 안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즉, 믿음이라는 것이 의지를 가진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버지를 믿듯 그냥 믿어지고,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뭔가를 말씀하실 때 수용되고, 설득되고, 순종되는 충성된 사람으로 여기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본체가 아닌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도, 즉 육신을 가진 사람을 믿고, 또한 바울은 그들을 신실한 형제로 여기는 관계와 같이 교회 안에서 지체들을 대함에 서로 그러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바울 사도의 문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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