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13-17 흑암의 권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3. 2. 9. 14:26 Writer : 김홍덕

<흑암>이라는 것은 빛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빛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빛>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가장 먼저 창조하신 것이다. 빛이 있기 전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창세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빛이 있기 전에는 공허와 혼돈 그리고 흑암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과 흑암은 공존할 수 없는 상반된 개념의 세계인 것이다.


<빛>은 광선이나 조명에 국한된 표현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세상의 빛(요 12:46)이라 하셨는데, 이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이 밝아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잘 모르는 사람을 ‘컴맹’이라고 한다. 컴퓨터에 대하여 어둡다는 이야기다. 성경에 나오는 어두움과 흑암은 바로 이런 어두움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성경에 나오는 어두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어두움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어두움이다. 또한 하나님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은 세상 전부에 대하여 어두운 자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생명이시니 어둡다는 것은 생명에 대하여 어둡다는 것이요, 그것은 또한 죽음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존재와 상황 안에는 생명도 없고, 하나님의 계시도 없고, 세상에 대한 이치도 알지 못하는 어두움 곧 흑암의 권세만 있다는 것이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의 존재 목적과 사용 방법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들에게 늘 부딪히고 박히고 하며 고통 받게 된다. 그리고 두려워 지게 된다. 집에 있는 내 방이라 할지라도 빛이 없으면 그 안에 있는 책상에게도 부딪히고, 선풍기도 넘어뜨리게 되고, 바닥에 놓인 것을 밟아서 발이 아프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빛이 없으면 책상을 공부하는데 사용하지도 못하고, 선풍기를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곧 어디에 부딪히고 망가뜨릴까 싶어 조심하게 된다.


태양이 뜨고 조명이 들어온다고 해서, 또한 육신으로 맹인이 아니라고 해서 빛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치는 일들과 세상에 존재하는 일들과 상황에 늘 부딪히고, 다스리지 못하기에 오히려 자신이 상할까 늘 두려워하여 조심하고 보험 같은 대책들을 강구하고, 결국 종교를 찾아 자신에게 닥칠 일들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려고 한다. 이런 인생들의 모습이 빛이 없는 방에 들어가는 사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즉 모든 인생이 흑암 중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을 <빛>이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마치 어두운 방에 들어가며 조명을 켠 것 같이, 인생이 가진 모든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모습을 통해 인생으로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빛>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 오히려 인생의 빛이 되셨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연약한 육신의 한계를 수용하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돌아가셨는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려 돌아가셨다는 그 명제만 가져오고 나머지는 예수님을 못 박은 유대인의 가치관을 좇아가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초라한 인생인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못 박았다. 그들에게 메시야는 그런 초라한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와 같이 지금의 큰 교회들도 사회에서 성공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친다.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같은 모습이다. 그러면서도 단지 BC의 시대가 아니라 AD의 시대를 산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이 유대인과 다르다고 생각하니 그곳에 제대로 된 신앙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큰 교회들이 추구하는 것과 같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잘 살수록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은 물질만능주의로 타락한 종교적인 폐습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 관점으로 살고 가르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히려 십자가에 죄인의 모습으로 달려서 기적적인 능력으로 내려오지도 못하고 엘리야도 나타나지 않는 그런 연약한 인생의 모습이 드러나는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빛>을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연약한 인생을 인정하고 위대해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이 아니라, 세상적인인 가치관이나 지금의 큰 교회들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자기의 모습이 죄인으로 발견되는 줄 알지만, 그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하신 모습임을 알고 선언하고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빛을 만난 삶인 것이다.


반면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려 돌아가셨다는 명제만 교리로 가져오고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연약한 예수님은 버리고 세상적인인 성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흑암의 권세>이다. 그런 생각은 교회 안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기에 어두움임에도 아무도 거리낌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가게 하는 그 힘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세상적인으로 보면 모든 채용에 있어 시험을 통해 그 능력이 입증된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것이 암묵적인 동의를 받는다. 그런 암묵적 동의를 일으키는 힘이 바로 <흑암의 권세>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법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 관계로 만나시기를 원하시지만, 세상은 늘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종의 신앙관으로 운영되는 것이 진리라고 암묵적인 동의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을 성경은 <흑암의 권세>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흑암의 권세는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큰 교회들 안에도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성가대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찬양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이 위대해지는 노래를 듣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찬양으로 받으신다. 음치일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고, 음악적으로는 듣기에 좋지 않다 해도 찬양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받아가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지금의 큰 교회들은 흑암의 권세 아래 종노릇하다 보니 성악과 출신들에게 돈을 주고서 성가대를 운영하려 하고, 그것이 옳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그 모든 교인들이 다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는 것이다.





흑암의 권세는 세상적인인 가치관과 방법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는 힘을 말한다. 목사를 뽑을 때, 신앙고백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역량을 나타내는 약력을 보는 것에 모두 동의하는 힘이 바로 흑암의 권세이다. 그렇게 보면 흑암의 권세가 얼마나 우리의 마음 안에 깊숙이 있는지 놀라운 것이다. 돈이 기준이 되는 것, 인간적인 능력이 기준이 되는 것, 나에게 얼마나 유익이 되는가가 기준이 되는 그런 모든 것으로 사람을 대하고 신앙생활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것이 바로 흑암의 권세인 것이다.


바울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골 1:13)” 이라 하셨다. 즉,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밝음과 안목 아래에 가면,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의 법으로 살게 하셔서, 마치 불 켜진 방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그 용도대로 사용함으로 갈등이 없듯, 세상을 살아감에 평안과 감사함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 빛이 있는 곳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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