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과 회복을 다루고 있는 구약성경의 선지서들을 읽으면 드는 의문이 있다. "왜 이렇게 타락을 반복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정말로 그렇게 하나님을 매번 배신하는가?" 같은 것이다. 그건 개인적으로도 참 궁금했던 것이다.


선지서들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타락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성전을 훼파하고 다른 성전을 짓고 다른 신을 섬긴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타락은 항상 여호와의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출애굽 당시에 금송아지를 만들고도 '금송아지'신을 섬긴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숭배했던 것이다.


신앙의 타락은 믿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 다른 것을 결합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타락이라는 것이다. 맑은 물에 아주 약간의 더러운 물이나 독이 들어가도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타락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악습이다. 그것은 골로새교회에도 있었고 지금도 늘 있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좋아 보이는 것이 더해지면 신앙이 더 좋은 것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성전에 이방신의 우상을 두는 것이고, 골로새교회처럼 철학과 과학이 겸비되면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에는 교회가 더 좋은 건물을 가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장로가 되는 암묵적 조건으로 사회적 지위가 가미되고, 목회자도 신앙고백 보다 학위나 어떤 경력이 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 된 것이 바로 그런 타락의 후손인 것이다. 그런 타락을 일갈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한마디가 아닐까 생각된다.


사람들이 이러한 형태를 보이는 것은 노아 홍수 시절에서부터 기원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 혼인하여 네피림이라는 위대한 자를 낳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사람의 딸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여자(육신의 여자가 아니다.) 즉 사람에게서 난 것의 아름다움이다. 그것을 골로새교회에서 본다면 과학과 철학이고, 지금의 세대로 보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전에 놓인 우상의 가족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렇게 신앙에 어떤 것을 가미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가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어떤 선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떤 선의 기준을 가지고 그 선을 추구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 선한 것이고,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어떤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


그 마음은 선악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스스로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이라는 결정을 하는 것을 먹었다는 것이다. 먹었다는 것은 자신의 몸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기에 그것이 사람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었다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어떤 유혹에 이끌린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었다. 즉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에 이끌리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과,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도 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선악과를 먹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수천 년 전의 일을 역사처럼 읽으라고 우리에게 있는 말씀이 아니다.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읽게 만들어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선악과를 먹는 것은 이 육신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에 대하여 태초 이전의 상태와 같이 어둡고, 또한 생명의 기준으로 보면 살았다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육신의 한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달라진다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이고 기본 법칙이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기 전과 후의 아담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벗은 몸으로 살던 아담에게 벗었다는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신의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도 않고 문제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태도는 달랐다. 자신이 벗었다는 것,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되어 숨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다.


사람이 벌거벗었다는 것은 육신이 벗었다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태어난 상태 그대로를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상태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과 그렇지 않고 원래 지으신 모습 그대로가 만족스러운 상태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에덴동산이 만족의 동산이라는 의미임을 생각해보면 더 분명하다.)


사람이 무엇을 어떤 것을 더하는 것은 만족되지 않아서이다. 자동차를 사서 이것저것 치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래 만들어진 그대로의 상태가 만족스러운 사람은 그것에 덧붙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모습, 또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으로 만족이 되는 사람은 세상의 철학이나 과학이나 또는 잘살면 좋다거나 세상에서 성공하면 더 좋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사도는 골로새교회가 신앙에 다른 것을 접목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깊이 새겨야 하는 말씀이다. 사람은 연약하다. 마음에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악한 것이 많이 나온다. 욕심도 그렇고, 성욕도 그렇고, 시기도 그렇고 질투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을 사람 스스로가 선한 것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사람 안에 두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만족하는 모습이다.


사람이 그것이 만족이 안 되기 때문에 그것들을 일일이 제어하고 규제하고 어떻게 해야 선하고 어떻게 하면 악한 것인지를 정하고 그렇게 행동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율법도 필요하고 과학도 필요하고 예의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 하나가 만족이 안 되어서 세상이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 목적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분명해 지는 것이다. 성욕이 나쁜 것인가? 그것을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가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닌가? 시기가 나쁜 것인가?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것을 시기하는 것이 나쁜 것인가? 질투가 나쁜 것인가? 하나님을 더 잘 믿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나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날카로운 것은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베이지 않아야 만족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뭔가 조치를 취할 것이다. 덮개를 하거나 무디게 만들 것이다. 아니면 버리든지. 하지만 칼에게 날카로움이 없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다만 칼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면 되는 것이다. 그것처럼 사람이 가진 성품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악하고 추해 보이는 것들도 어떤 목적 안에 있으면 다 온전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지어진 목적을 알지 못하면 사람이 가진 연약함은 언제나 문제가 있고 이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조치가 바로 신앙에 또한 사람에게 뭔가를 더하는 것이다. 그 원조는 아담이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린 것이고, 시날 광야에서는 흙(사람)을 구워(단련해서) 하늘에 이르게 하려 한 것이고, 골로새교회는 과학과 철학을 더한 것이고, 오늘날의 교회는 세상의 성공과 화려함을 노아의 홍수 때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과 같이 취해서 위대해지고 있는 것이다.


골로새서는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신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렇게 신앙이 회복된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마지막에 권면처럼 말씀하고 있는 책이다. 바울사도가 먼저 신앙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이어서 삶의 모습을 권면했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되다. 그것은 삶의 모습은 신앙의 정체성, 즉 생명에서 비롯되는 본성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대로를 감사할 수 있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고,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 앞에 육신을 부끄럽게 또한 죄악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고 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삶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부름 받은 온전한 것임을 아는 마음에서 시작한 신앙은 성경에 기록한 모든 말씀을 행함에 있어 의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살기만 하면 되는 생명에서 비롯된 본성의 표현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신앙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법임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골로새서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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