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는 구변과 증거와 은사가 넘쳤지만 서로 다투었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오늘날 세례의 형식으로 교단이 달라지듯 신앙적 이유로 다투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 이유를 세상의 지식을 좇기 때문이라고 책망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의 지혜가 신앙의 분쟁을 일으키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상의 지혜와 십자가의 도는 방향성이 다르다. 그리고 정체성도 다르다. 세상의 지혜는 높은 것을 좇고 사모하며 추구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낮고 천한 것이다. 낮고 천한 자리에 하나님의 도가 있다. 또 세상은 나타난 것 곧 형식이고, 십자가는 의와 내용이다.

 

특히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에 가치를 두고 인생을 들여 추구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그에 부여된 가치를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세례의 형식을 두고 교단이 갈라졌다는 건 세례를 어떤 형식으로 행하느냐에 따라 세례가 유효하거나 혹은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신념과 가치와 주장을 낳는다.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이랬다. 그리고 오늘도 그렇다.

 

바로 사람의 이런 생각과 가치관과 주장이 세상의 지식이다. 이 지식에 의해 사람이 추구할 것이 정해지고 추구하는 수단과 방법이 정해지면 결과를 평가한다. 그리고 방향은 높은 곳을 향한다. 세상의 지혜의 기본 유전자는 바로 피라미드 위를 향하는 본성이다.

 

이런 세상의 지식은 반복적으로 언급한 대로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지금도 그렇다. 문제는 그렇더라도 구원이 담보된다면, 그런 문제는 신앙의 작은 부분이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 데 있다. 가치관은 생명에서,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독수리와 늑대는 썩은 고기에 진정한 가치를 두지만, 양과 염소에겐 하등의 가치도 없는 것과 같다.

 

더욱이 십자가의 도와 세상의 지혜는 방향이 다르다. 남과 북, 각각을 향해 달리는 것은 근본부터 다르다. 즉 세상의 지혜로 신앙을 보는 건 진정한 구원을 받았다고 하기 어렵다.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라는 생명은 높은 곳이 아닌 낮고 천한 십자가를 귀하게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도가 귀하면 세상의 지혜는 천하게 되고, 세상의 지혜를 사모하면 십자가의 도는 천한 것이 되는 관계다.

 

그렇다면 오늘날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서 높아지려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다. 세상의 귀하고 비싼 것으로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믿고 말하는 것 역시 모순일 뿐 신앙이 아니다. 세례는 어떤 형식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성경은 특정 성경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 같은 건 모두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한마디로 분열이 있다는 자체로 이미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세상의 지혜가 분열을 일으키는 이유는 육신의 정욕을 좇기 때문이다. 육신은 그 자체가 형식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내용을 채울 형식으로 사람을 만드셨는데 중요한 인생의 목적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육신을 위해, 육신의 눈이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보고 인생을 산다. 이것이 형식을 본질로 보는 것이고 세상의 지혜를 사모하는 것이다.

 

피라미드는 위로 갈수록 좁고, 사람이 가진 세상의 가치는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것을 주장하니 싸움이 나고 분쟁이 일어난다. 바벨탑을 쌓을 때 언어가 달라졌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늘로 가고 싶은 욕망은 같아 보이지만 추구하는 것이 다르니 말이 다르고 이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사건이 바벨탑 사건이다. 세상의 지혜가 일으킨 분열의 상징이다.

 

십자가의 도는 이와 달리 낮아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며, 우리가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이유이자 채워야 할 것인데, 이것과 달리 높은 곳을 추구하는 세상의 지혜로, 자기 육신이 바라는 걸 하나님께 구하는 마음으로 십자가의 도와 복음을 보니 다툴 수밖에 없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분쟁의 이유이고,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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