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의 서신 속에는 많은 염려와 훈계 그리고 책망들이 있다.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바울 사도의 서신 속에도 책망과 염려가 있다. 행위냐 믿음이냐에 대한 서신을 보내는 것 자체가 갈라디아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믿음과 행위에 대한 혼동과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사도들의 책망은 그 문장 자체로만 보면 모두가 구원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구원에서 떨어질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시기도 했지만, 누구도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가 구원을 얻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이 갈라디아서의 내용만으로 본다면 믿음이 없는 것은 곧 구원을 얻지 못하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라는 의미기 때문에 우리에게 혼돈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과 믿음이 온 사람은 사도들의 책망을 소화하는 것이 완전히 다르다. 책망이나 훈계에 관한 말씀을 듣고 더 나아지려 한다는 것에서 표면적으로 같아 보이지만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은 더 노력하고, 믿음이 온 사람은 더 성장하게 한다는 것이 다르다. 노력과 성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성장이라는 것은 생명에 사용하는 말이라는 점이 근본적 차이다. 성장은 이미 있는 생명의 본성이 자라는 것이고, 노력은 없는 것을 가지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완전히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아 보이지만,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의 서신 속에는 분명히 우리너희가 있다. 그리고 책망의 대상이자 미혹하는 무리가 있다. 당연히 서신을 기록한 사도들의 공통적인 방향성은 너희가 우리 같이. 서신서의 주된 수신자는 우리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너희라는 것이다. 이것은 서신을 기록한 목적 그 자체이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에 이르러야 하는 너희가 존재하며, 너희라는 사람들의 성숙도는 다양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각 사람의 신앙의 여정, 신앙의 성숙도가 다양함을 대변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롸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갈 4:12)

 

따라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어찌하여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는가?”라고 반문하는 것은 미혹하는 무리에게서 우리와 같이 되어야 할 너희를 권면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우리는 갈라디아교회, 고린도교회, 골로새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미혹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구분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다.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신다는 믿음으로 사람을 권면하는 것이 바로 미혹그 자체다. ‘~~하면이라는 가정과 조건에는 반드시 기도나 봉사와 같은 행함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은 항상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반응하신다고 믿기에 책망 앞에서도 더 노력한다.

 

반면에 바울 사도와 사도들이 자신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책망과 교훈이 의도하는 바가 자기 안에 생명의 본성으로 있는 사람이다. 근원적으로 믿음은 노력을 요구하지 않으므로 교훈을 주는 사도들의 의도는 너희안에 이미 있는 것을 지키고, 그 생명 본성이 장성한 분량이 되는 것이다. 이미 있는 정체성을 더 확고히 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는 점에서 노력과 엄연히 구분된다. 노력은 그 자체가 없는 것을 도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책망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다. 요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자신이 거듭난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책망을 인하여 구원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책망이 의도하는 바가 이미 거듭날 때 얻은 생명의 본성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지키려고 또 예수님처럼 노력하는 신앙에 속한 사람은 이런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행여 구원에서 끊어질까 염려한다. 그리고 또 노력한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에게 왜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하는지 반문한다. 다시 돌아가려고 묻는다는 것은 이미 있는 자리에서 이전 자리로 돌아가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에서 바울 사도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너희라는 부류의 정체성과 책망의 의도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런 책망이나 교훈의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란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림을 인정하고 거듭났을 때 이미 얻은 생명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자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도에 반응한다. 이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교육이란 말은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끌어낸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이것이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은 사도의 교훈과 성경의 말씀이 그리스도로 이끄는 것이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 예수님께서 목욕한 자라고 하신 사람이라면 성경 말씀에 비추어 부족한 자기 삶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이 더 자라는 계기가 된다. 형이 동생을 잘 보살피지 못할 때나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나 언제나 형이기에 깨달으면 더 형다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형이 아니라면 노력한다 해도 형이 되지는 않는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왜 성경이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하는지 또 확인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성경의 교훈들은 모두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함을 지양하도록 권면한다. 구원은 시작이고, 그 시작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유일하게 여기시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난 사람이라면 성경의 모든 권면, 심지어 질책이라도 그리스도의 장성함으로 이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들의 권면이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때로 어떤 말씀들은 마치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 안에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구원의 문제나, 더 많은 신앙적 행위와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믿음, 율법이 지나고 난 다음에 온 믿음을 끌어내는 것임을 스스로 안다. 사도들의 교훈은 그렇게 와 닿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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