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편지다. 수신자의 절대다수가 이방인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이들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람의 후손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이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들은 육신으로는 분명히 하갈의 혈통인 이방인인데 믿음이 온 사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은 사람은 육신의 혈통과 무관하게 사라의 자손, 곧 하나님 약속의 아브라함 후손이라고 선언한다.

 

행함과 믿음이라는 대 주제를 설명하면서 사라와 하갈을 비유로 설명한 것은 굉장히 신선하고 놀라운 것이다. 하지만 너무 명료한 설명이다. 성경을 보는 바울 사도의 깊은 안목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행함은 육신으로 의로워지는 것이고, 믿음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하가(하갈)과 사라의 근원적인 차이는 자유에 있다고 했다. 하갈은 종이고, 사라는 자유한 여인이라는 것인데, 특히 주목할 것은 하갈의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곧 종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법대로 하지 않으면 원치 않는 결과를 강제하는 강제성을 법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대로 혹은 설교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주신다고 믿거나, 아니면 복을 받을 수 없다고 믿는 신앙은 법의 강제성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율법 아래 있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혹은 설교를 듣고 그렇게 해야만 복을 받는다고 믿는 신앙생활은 율법 아래 있는 종의 신앙이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육신으로 하갈의 후손이 갈라디아교회의 성도들을 오히려 이삭의 후손이자 약속의 후손이라고 했듯,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믿는다면 혈통이나 종교적 신분이나 공로와 무관하게 복을 받기 위해서 혹은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하는 신앙생활은 모두 자신이 종인 하갈의 후손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 진정한 신앙이 아니다.

 

이와 같은 종의 신앙은 종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육체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체의 행위로 의로워지려 한다. 운전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사업이 잘되려면 기도는 물론이고 헌금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해야 한다. 성령의 은사인 방언을 받으려면 소나무 하나를 뽑아야 하고, 천국에서 잘 살려면 이 땅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충실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모든 것이 해야 하는신앙이다. Have to 곧 강제된 일이다. 종이 밥 얻어먹고 또 평안을 얻으려면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갈 4:23)

 

반면에 자유한 여자 사라의 후손은 그렇지 않다. 어떤 의무감이나 강제하는 법을 인하여 혹은 사업의 성공과 같은 자기 이익에 대한 목적을 위하여 육체의 행위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이것이 자유한 자의 후손이고, 아들이란 신분이 종과 다른 이유다. 이것을 약속의 후손이라고도 하는데 알고 보면 이 약속은 하나님이 정하셨을 뿐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데 사람은 단지 그것을 자기 존재 목적으로 인정하고 순종하기만 하면 된다. 육체의 행위나 공로가 전혀 필요 없다.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바울 사도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을 듣지 못했느냐고 반문하면서 사라와 하갈을 비유로 율법과 행위에 대하여 설명했다. 율법을 지키고자 하면서 어찌 사라와 하갈을 알지도 못하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 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갈 4:21-22)

 

이것은 오늘날도 같다. 성경을 읽고 공부했다면 어떻게 기도하면 복을 준다는 것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임은 상식으로도 가늠할 수 있는 일인데도 알지 못한다. 요한 사도는 사람들이 이렇게 어두운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상의 자랑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의 안위와 세상에서의 성공을 목적으로 삼기에 세상과 같이 드러난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6)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믿음이 온 사람이라면 이런 신앙 안에 있을 수 없다. 아직 이 신앙 안에 있다면 당연히 율법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율법을 모르면 복음은 당연히 알 수 없다. 율법을 인하여 죄를 깨달아야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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