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과 자유인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다르다. 이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적 주제인 행함과 믿음이라는 근간이다. 줄곧 설명한 대로 율법과 의로워지려는 행함의 정체성은 언제나 수단이다. 다른 목적이 있다. 복을 받으려는 것 혹은 재앙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이 목적이고 행동은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다. 목적이 육신에 있기에 수단도 육신의 행위가 된다. 이것은 변명할 수 없는 증거다. 이것은 종이 육신의 수고를 대가로 주인으로부터 육신의 음식과 평안을 얻는 것과 같다.

 

반대로 자유인의 행위는 자유에서 나온다. 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거나 벌을 받는다는 압박으로 인하여 행동하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을 좇아 행한다. 그게 자유인이다. 종은 일하지 않으면 밥 먹기 힘들지만, 아들은 매일 놀아도 밥을 챙겨 주는 것과 같다. 그렇게 보면 오늘날 신앙인들이 기도하고 봉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종의 신앙인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인은 자기 안에 본성을 좇아 살 뿐인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란 의미다. 괜히 그리스도로 거듭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거듭난 생명이 그 자유로운 본성 자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언제나 종의 신앙으로 돌아갈 여지가 있다.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는데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거나 거듭난 생명이 아직 어리기 때문이다. ‘사도의 권면 속에 있는 교훈에서 언급한 편지 수신자의 구분이 여기에도 적용된다. 사도들이 우리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너희는 거듭났으나 어린 신앙이라면 거듭나지 못했는데 자신이 거듭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미혹하는 자다. 거듭나지 못했는데 거듭났다고 믿는 만큼 종의 신앙이 강해지기에 그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미혹이다. 거듭나지 못했는데 거듭난 증거를 끊임없이 확보해야 하기에 늘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 그 노력은 당연히 행함이다. 자기 마음속에 자유롭게 행하게 하는 본성이 없으므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눈에 보이는 형식인 육신에서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서신은 아직 어린 생명, ‘우리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형제(거듭난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 5장에 들어가면 할례를 언급하는데 이는 미혹하는 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혹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이 미혹하는 내용이 자기 안에 있는 본성에 어긋나지만 스스로 증거를 찾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이 갈등하는 이들에게 너희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라고 확신을 주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갈 4:31)

 

다시 한번 우리는 여기서 이 편지의 수신자 대부분이 육신으로 사라의 후손이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육체의 혈통으로 자유한 자와 종이 결정되지 않고 믿음이 있느냐로 구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거룩의 어원이 구분하다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믿음 가진 사람을 거룩하다고 하시는 이유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육신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 종교적인 이유로 할례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로 약속하신 언약의 후손이다. 더 분명히 하자면 육신의 혈통에 무관하게 누구나 이 언약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 흙으로 지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시할 땅, 곧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육신 가진 모든 사람의 본분이고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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