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2 장) 육체로 사는 이유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6. 1. 11:08 Writer : 김홍덕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겠지만 신앙의 많은 부분이 거꾸로 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행함과 믿음이다. 행함으로 의로워진다는 것은 행함으로 인하여 의로워진다는 것이고, 믿음으로 의로워진 사람들의 이야기인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은 의로워진 사람에겐 그 삶으로 나타나는 행함이 있다는 의미다. 행함에서 의로워지느냐? 반대로 의로워진 생명의 삶으로 나타난 행함이냐는 방향이 반대다.

 

여기서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오늘날 사람들이 행함으로 생각지 않는 기도와 감사와 같은 것 역시 행함이라는 것이다.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복을 주시며 하는 일이 잘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행함이 시작이고 자기 육신이 바라는 바가 결과다. 즉 행함에서 의로움으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삶의 의미가 되어 있으므로 그것이 바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방향이 거꾸로 되어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이것을 설명한다면 이렇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우며 노력한다. 그렇게 해야 육신의 삶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각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은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육신의 복락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건강하며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는 삶이다. 그것에 인생에 의미를 두고 있다. 그것이 의로움이다. 그 의로움을 얻기 위해서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런데 어쩌랴? 이것이 바로 행함으로 의로워지는 것의 표본이고 본질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삶에는 육신으로 사는 이유가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지만 바울 사도의 유명한 고백인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라고 밝힌 육체 가운데 사는 이유가 모호해진다는 말이다. 육체의 정욕을 목적으로 삼고 살기 때문이다. 육체에 사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위해서 살고 있다는 말이다.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안녕과 복락을 위하여 성경대로 사는 삶을 두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육체 안에 산다고 할 수는 없다. 이미 육체의 정욕이라는 목적이 설정되어 있는데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목적이 들어갈 자리조차 없다. 그러면서 이 갈라디아서 220절을 찬양한다. 감정을 한껏 넣어가면서. 이보다 더한 위선과 외식이 있을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 사도는 자신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분명 우리 모두의 고백이어야 한다. 고백이라는 것은 이미 경험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희망사항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가 자신에게도 있다는 의미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에 이끌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의롭지만 정죄 받았을 때 육신을 내어주는 것이 자신의 본성이 된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다. 세상의 가치로 높은 곳에 이르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기는 오늘날 신앙인들이 논할 수 있는 본성이 아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아니라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아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신이 거듭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스스로 돌아보아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자신이 거듭난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도 아니라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것이 자기 죄를 시인하고 자백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이기고 높은 자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최소한의 양심이다. 이게 없으면 양심이 화인 맞은 것이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이와 같이 외식하는 신앙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여기면서 보여주는 신앙생활은 모두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다. 하지만 육신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 바울 사도의 주제이고 갈라디아서의 주제다. 그리고 육신이 그 행위로 의로워 질 수 없다면, 그러니까 육체의 행위나 공로로 인생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면 육신으로 사는 이유가 없어진다. 사람들이 인생을 허무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육체 가운데 사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삶과 생명의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보여주신 것을 그대로 순종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나의 본성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내 삶의 생명이자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는 육체 가운데 산다. 그렇다는 것은 육체 안에 사는 이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든 아니면 다른 것에 있든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삶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태어났으니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 안에서 이유와 목표를 정하고 닥치는 대로 살 수 있지만 그것은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이 의로움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행위로 의로워지는 삶이다.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미를 두지 않는 죄와 사망의 삶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육체 가운데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 안에서 분명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고 신앙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깊이 상고해 봐야 한다. 지나칠 정도로 반복되고 있지만 다시 한 번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라는 것, 믿고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고해 봐야 한다. 이것은 너무 중요한 것이다. 한편으로 너무 쉬운 논리인데 사람이 자기 욕심을 인하여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께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육신의 어떠함이 은혜의 척도이자 의로움의 척도일 뿐 아니라 인생의 목표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이라는 것을 빌미로 성경을 지켜서 자신이 삶의 의미로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로 사는 이유가 아니라 육체가 목적인 삶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도깨비 방망이로 여기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육체로 사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이신 것이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던 본성이 자기 생명과 삶의 본성이 된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믿기에 의롭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주장 앞에 내 자신을 죄인으로 내어주는 것이 본성이 된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므로 세상 사람보다 잘 났고 의롭다고 유세하는 오늘날 신앙인들의 모습과 상반된 모습이 예수 위해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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