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마무리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갈라디아서 Date : 2021. 10. 13. 16:50 Writer : 김홍덕

갈라디아서는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일들로 시작해서 믿음과 행함’, ‘복음과 율법이라는 끊이지 않는 논쟁의 주제에 대하여 많은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갈라디아서에서는 율법에 관하여 성령’, ‘육체’, ‘약속이라는 주제들을 소환하여 설명했고, 마지막에는 육체의 행위가 자신을 의롭게 한다는 생각의 대표로 할례를 들어 육체의 행함은 무익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더는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당부한다. 이는 율법과 복음’, ‘행함과 믿음이라는 주제, 더 정확히는 육체의 행위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라 더는 생각도 말도 하지 말라는 의미라 말할 수 있다.

 

로마서에서는 율법이나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설명함에 있어 종교적 관점보다 일반적인 가치관, 당시의 로마인들의 관점에서 설명했다면 갈라디아서는 많은 부분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율법, 아브라함, 사라와 하갈, 할례와 같은 주제들을 끌어내어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만든다는 것을 설명한다.

 

 

특히 약속을 가지고 설명한 것은 놀라운 관점이다. 어쩌면 갈라디아의 성도들을 미혹하는 이들이 자신들이 할례를 받은 유대인,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빌미로 율법 준수를 많이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갈라디아는 이방인들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들어서 믿음을 설명한 것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에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갈라디아서는 아주 좋은 말씀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쨌든 자신을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믿음이 과연 이 갈라디아서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 그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드러나게 하는 믿음인지 돌아볼 수 있는 프레임 안에 스스로 자신을 넣어둔 셈이다.

 

하지만 본문 속에서 지나칠 정도로 많이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신앙인들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믿음은 갈라디아서가, 예수님과 사도가 말씀하시는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에서부터 진정한 믿음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어서 얻으려는 결과가 육체의 일이기에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이라, 주실 것이라 믿는 것이 하나같이 육신의 삶에 종속된 일이라는 것마저 부인하면 말 그대로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 믿고 바라는 것이 육체의 일인 까닭에 그 반대급부로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려 한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를 두고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사도들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이런 성경의 권면을 외면하고 자기 생각대로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얻고자 하나님을 믿고, 그런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길 바라며 헌금하고 육체로 성경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신앙이 갈라디아서가 말씀하고 있는 육체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다.

 

이 갈라디아서에 대한 글은 오늘날 신앙인들이 그런 어두움 속에 있는 상황임을 밝히기 위하여 썼다. 오늘이나 어제 그리고 내일 또 하나님 앞에 무엇을 기도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육신의 일과 자녀의 일과 사업이나 세상의 일과 같은 것을 얻으려는 게 가장 근원적인 목적이라면, 그리고 그것을 얻고자 하나님께 순종을 다짐한다면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에 속한 사람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것을 인정하면 바로 믿음의 길로 들어선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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