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 22

옷을 찢고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Date : 2018. 6. 26. 09:57 Writer : 김홍덕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아니 정확하게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엄연히 예수를 믿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예수님은 한 분이시기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있어서 믿음의 온전성은 변수지만 믿음의 대상은 상수다. 자신이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든 예수님의 정체성은 온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도 상수라고 하기 어렵고, 다니는 목적 역시 상수는 아니다.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나 예수를 믿는 목적은 사실 상수가 아니다. 다들 자기들 만의 목적이 있다. 구원을 포함하여 내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준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부터 정치적인 목적까지 다양하다. 물론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수용하는 것임을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런 믿음은 수동적인 믿음이다. 구원과 천국을 포함하여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이나 구원을 비롯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다. 하나님께서 천국과 구원을 약속하신 것은 그 약속이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육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그 삶 자체가 천국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이것을 느낄 수 없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이 인생을 고난으로 여기는 괴로움에서의 구원이고, 그 삶이 사후까지 연장되는 것이 천국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 동안은 곤고하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한다. 웃기는 것은 죽음은 흔히들 착하게 살면 천국이나 극락에 간다고 생각하듯 이 세상 삶의 연장이지 전환, 그것도 세상에서는 고생하면 죽어서는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간다는 생각과 같이 이 세상과 사후의 삶이 연장선 상에 있다고 여기려면 모든 방면에서 그러해야 하는 것이지, 착한 행실로 착한 행실을 한 사람에 대한 보상이 있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고난으로 여긴 삶이 죽어서는 기쁨이 된다는 전환은 서로 다른 개념인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단 한 가지 근거는 이 세상의 고생이 천국의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거래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는 신앙>의 본질적 모습인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메커니즘은 어이없게도 부족한 신앙에 대한 문제 의식을 희석시킨다. 행위로 온전할 수 없다는 것을 노력의 부족함을 용납하는 변명으로 용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을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육신이 연약해서 그것을 다 지킬 수 없고, 이것은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신앙을 정의하고 있기에 때로 부족한 것을 앞으로 잘 할 것이라는 고백과 전제만 있다면 용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지고 온 더 큰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것에 삶을 올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개념 아래에 있으면 노력은 지속적인 것이기에 지금 좀 부족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노력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부족하기에 하는 행위인데 지금 이 시간 예수 믿는 것에 올인할 동기부여가 매우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항상 부족한 상태와 동행한다는 것은 문제를 전부로 보지 않는 것이고, 그런 관점에서 신앙은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옵션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선 행위 규범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인생의 옵션이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도 아니며, 지금 당장 모든 것을 다 이루지 않아도 괜찮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하심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기본적이고 절대적으로 내가 누구인지의 문제이며, 그것은 인생 전체의 문제이다. 즉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을 믿기에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노력들이 온전하지 못하고 인생이 연약하다는 핑계로 늘 노력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아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신앙이기에 신앙을 삶의 일부로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누가 좀 더 노력하는지, 그래서 목사나 장로가 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따지는 것이 존재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는 없다. 천국? 못 간다. 구원? 없다. 생명? 그게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것이면 바로 믿고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그럴 값이 아니라면 그냥 세상을 즐기면서 사는게 낫다. 어차피 구원도 못 받는데 삶을 경건이란 이름의 구속을 하나 더 당하면서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어 구원을 얻고 천국가야 할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사는 이유와 의미를 알고 삶이 감사하고 만족과 안식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신앙을 하나의 옵션처럼 여겨서는 곤란하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이 선명해지지 않고, 삶이 만족스럽고 감사하지 않다면, 단지 닥치는 문제와 고난을 예수의 이름으로 이겨내려 투쟁하는 것이 지금의 삶이라면 모든 것을 버리고 먼저 자기 삶의 의미 곧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여야 한다. 옷을 찢고, 또 옷을 버려 두고서 예수님이 보이신 길을 좇아야 한다. 삶의 모든 형식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버림과 올인은 삶의 모양과 형식에 관한 것이 아니다. 형식을 버리는 것, 삶의 형식을 버리라고 하는데 삶의 모양인 직업이나 생업이나 사회를 버리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바보다. 버릴 것이 삶의 형식이라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행위로 믿는 것이고, 형식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삶의 모든 형식,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직업을 버릴 것이 아니라, 직업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할 것인지를 간구해야 한다. 성경을 의문스런 부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기를 간구하여야 한다. 이런 간절함 없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예수를 조롱하는 것이다. 육신을 십자가에 버린 주님을 따라간다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욕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약시대에는 회개를 할 때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 섰다고 했다.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겉 옷(형식과 삶의 지위를 상징)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입고 있는 옷, 곧 하고 있는 사업과 영위하는 삶의 풍요와 안정을 기도하고 간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망과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여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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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철민 2018.06.30 13:09

    자기 義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 義
    -----------
    종교인
    그리스도인
    -----------
    육신을 만족시키는것
    영혼을 만족시키는것
    ------------
    유효기간
    영원한것
    -----------
    자신이 선과 악의 기준
    하나님이 선과악의 기준
    -----------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깊은 묵상과 변화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늘 함께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필자의 그리스도로 섬기 시니 저에게는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게 합니다.저도 그대로 그리스도를 직장에서 전합니다.

    수정/삭제 답글
    • Favicon of https://www.elphis.or.kr BlogIcon 김홍덕 2018.07.01 10:55 신고

      반갑습니다. 직장에 복음을 전하신다고 하니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수정/삭제

미완성 사도신경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Date : 2017. 1. 8. 12:34 Writer : 김홍덕

기독교 신앙 고백으로 ‘사도신경’이 있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니를 내가 믿사오며…’로 시작하는. 그리고 이 신앙고백은 많은 경우 이단과 정통 신앙을 구분하는 기준점에 있기도 합니다. 사도신경의 일부 혹은 전부를 부인하면 이단이라는 논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도신경은 온전한 것일까요?


사도신경은 내용은 하나님의 성경과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 어느 것 하나 틀리거나 오류가 없는 완전무결한 내용입니다. 문제는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 너무 온전한 그 내용은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은 고백이라는 말 그대로 어떤 여정을 거쳐낸 사람의 고백 곧 신앙의 여정을 거쳐낸 결론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신경은 사도신경을 외우고 또 예배시간에 암송하고 세례문답에서 공부하여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앙의 여정을 거치고 나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할 수밖에 없는 고백 곧 결론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든 적절한 시점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에서도 ‘상황에 맞는 말은 은쟁반 위를 구르는 금사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 앞에서나 또 사람 앞에서 어떤 말은 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유치원생이 “인생은 원래 힘든거야!”라고 말하면 눈에 띄기는 하겠지만 맞는 말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이 이 사도신경 역시 사도신경을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내어 놓을 어떤 여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그냥 외워서 신앙이 생기는 것처럼 사용하면 그것은 주문은 될 수 있지만 고백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신경은 어떤 고백인지 살펴보아야겠지만 오늘은 사도신경의 강해가 아니므로 핵심적인 것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처음 부분 일부만 가지고 사도신경을 외우는 사람이 사도신경을 주문으로 하용사고 있는지 고백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가이드를 한 번 제시해볼까 합니다.


사도신경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믿사오니>라고 시작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전능하사 처지를 만드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어떠해야할까요? 그것은 당연히 이 세상은 참 온전한 곳이라는 것도 함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는 온전하신데 그분이 만든 세상은 온통 문제라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모순입니다.


오늘 같은 주일이면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예배 중간에는 대표기도라는 것이 있고 그 기도에는 마치 약속이나 있는 것 같이 공식처럼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세상을 위해서도. 그런데 그 내용들은 하나 같이 세상이 잘못되어가고 있으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웃기는 이야깁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이런 문제가 없도록 세상을 만들었어야 정상입니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아주실 전능한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는 왜 이런 문제가 없도록 하지 못했을까요?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과연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는 고백이 제대로 된 것일까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 바로 잡아 달라고 한다면 적어도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런 상태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진정한 고백일수 있을까요?


앞서서 말한 것과 같이 이 사도신경은 신앙고백입니다.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 고백이 있을 수밖에 없는 여정을 거쳐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것이 그 전정하시고 온전하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체휼했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아이러니하게 다시 하나님을 찾아가서 ‘당신은 전능하시니 이 잘못된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는 신앙의 여정을 거친 고백이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전능하다는 것은 완전무결하다는 의미입니다. 굳이 그런 의미를 전능하다는 말에서 찾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면 그 세상도 온전하다는 것까지 믿을 때 하나님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주일이면, 또 기도할 때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온전하심에 세상을 맡기는 것 같지만 내용은 ‘당신이 만든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으시죠?’라고 겁박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온전한 것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 동안의 한시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오늘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힘이 부족해서 마귀를 물리칠 때를 엿보면서 기다리는 식의 논리도 웃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아담의 타락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온전하시고 전능하시며 또한 그 전능하심과 온전하심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삼기에 자신의 신앙이 이단이 아니라 정통신앙이라는 자부심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의 온전함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세상은 온전치 못하니 전능하신 하나님(과연 이것을 믿는지 모르지만)께 계속 끊임없이 이 세상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순 속에서 자신은 정통 신앙 안에서 사도신경이라는 훌륭한 신앙고백을 가진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던지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을 시작할 때에 사도신경은 고백적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 신앙고백입니다. 고백이라는 것은 하나의 명제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명제나 믿음이나 신념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요 온전함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있어 그것이 고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은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신앙의 여정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은 온전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세상을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으로 불완전하다며 손대기 시작하고 자신들이 가진 기준으로 고치고 바꾸려하니 생긴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세상을 보는 자신의 안목의 문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길고 긴, 그리고 야곱의 여정과 같은 신앙의 여정이 자기 안에 있어서 세상을 바꾸려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을 바꾸고 세상이 어떤 모양으로 경영이 되더라도 억울하지만 십자가를 순순히 지신 예수님과 같이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고백일 때 이 사도신경이 미완이 아니라 온전하게 완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Unfinished  Apostles' Creed


There is an 'apostle nerve' in Christian confession. 'I believe in Abner, God Almighty, who made heaven and earth ... Starting with '. And this confession is often a reference point that distinguishes heresy from orthodox faith. If you deny some or all of the apostolic nerves, there is the logic of heresy. Then is this Apostles' Creed complete?


The Apostle 's Nerve is an absolutely perfect conten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Bible and the Gospel of God, which is either false or error - free. The problem is that all the contents of the apostle's nerve, and the content that is so thorough, is the conclusion. In other words, the confession of the Apostleship, which is a confession, is literally a conclusion about the confession of a person who has gone through a certain journey, the conclusion of a journey of faith. Therefore, the apostle's nervous system is to memorize the apostolic nervousness, to recite it in the worship hour, to study in the baptismal dialogue, not to be faith, but to make a confession, a conclusion,


This is an important point. Because there is an appropriate time for anything. In Proverbs, he said, "The right word for the situation is an apology for rolling over silver trays." That is to say, there is a time in front of me and in front of God. Kindergarten students may notice if they say, "Life is hard at first!" Likewise, this apostle's nerve should also have a certain journey to put the apostolic nerve into his confession of faith. If you use it just as you memorize it without faith, it can be a spell, but it can not be confessed.


Then I will have to look at the confession of the Apostleship, but today is not the strength of the Apostleship. No, I would like to give you a guide to gauge whether the person who memorizes the apostolic nervousness with only a part of the first episode is confessing whether or not he /


As the apostle says, "I believe in God our Father who made heaven and earth heaven and earth, and I believe in the only son, our Lord Jesus Christ." Then, if we believe in God as the omnipotent God, how should we view this world? It is, of course, that we must also believe that this world is a perfect place. It is a contradiction if the Heavenly Father who made the world is perfect and he has faith that the world he has made is a problem and that he should pray to God and correct it.


Many people gather and worship in the church this Sunday. There is a representative prayer in the middle of the worship, and the prayer for the country is like a formula like a promise. For the world. But the contents are going wrong together, and the Almighty God wants us to correct it. This is a very funny story.


If God is omnipotent, it is normal that we have made the world free from such problems. Why did not God have the power to correct the wrong world when God created it? If this contradiction can not be resolved, is it true that the confession that "I believe in God Almighty and Heavenly Father made me believe?" If you ask God to correct the world is wrong, at least the God who made the world is not omnipotent, and can the confession of believing in the Almighty God be such a true confession?


As I said earlier, this Apostles' Creed is a profession of faith. It is a confession. That's the way it must go through a journey that has to be confessed. To confess God to Almighty God is to comprehend that everything in God comes from its principled and perfect. It is ironic that the world created by the Almighty God is wrong, and that it is a confession after a journey of faith that can come to believe in the Almighty God that he will go to God again and pray, 'You are omnipotent, It is not.


Almighty means perfect. God is such a person even if we do not find such meaning in the word of almighty. To believe in God is to believe in all the attributes of God. Then, if God made the world, when we believe that the world is also perfect, we believe in God right away. It is only a matter of praying to God that we are praying to God that the world is wrong when we pray on Sundays and when we pray for God's omnipotence and completeness, but the content is nothing more than a cowardice, 'Do you correct it because you made a wrong world?' .


It is not a temporary situation before the fall of Adam that God is almighty and the world created by the Almighty God is complete. Even today Almighty God rules the world. And the logic of waiting for God to lack of strength and repelling the devil is funny. God is the same yesterday, today and forever. God is perfect and omnipotent before Adam's Fall, and now he is ruling the world by His omnipotence and perfection.


Therefore, if the faith of the apostle is to be confessed to his own faith, and if his faith is not a heresy but a pride and belief in orthodox faith, then he must acknowledge the integrity of the world, or the world can not be preached. Almighty God In the contradiction of constantly praying for the saving of this world, he must live in the orthodox faith, mistakenly believing that he has a good confession of faith called the Apostleship.


At the beginning of this article, the apostle was said to be a confession. And the Apostleship is literally a confession of faith. Confession is not a proposition. It is not about the proposition, faith or belief in the Almighty God. It is a belief that God is the Lord who rules the world with the integrity of creation and almighty creation.


If so, then at least in the world there must be a journey of faith to acknowledge that the world is perfect. However, the confusion of the world is that it must be discovered in itself that the world of God made perfect, that people are beginning to understand that they are incomplete on their own standards, and that they are correcting and replacing them with their own standards.


And the journey of faith like the long, long and Jacob's journey that can realize that all the problems of this world are not the problems of the world but the problems of the eyes of the world that see the world, And that the world will be governed in some way, but the mind must be able to obey, just like Jesus, who has been faithful to the cross. And when it is confessed, this apostle's nerve is not complete but can be completed to perf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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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1.11 15:30

    비밀댓글입니다

    수정/삭제 답글

성탄 인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Date : 2016. 12. 24. 11:12 Writer : 김홍덕

안녕하십니까?

<Bible become My Story!!> 블로그 운영자 김홍덕 집사입니다.


오늘은 성탄전야입니다. 성탄절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언제 오셨는지나, 그것을 믿느냐 아니냐의 여부가 성탄이 아니라, 우리 심령 안에 예수님이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상관 있으신 분, 나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신 분으로 내게 의미가 있어진 것이 진정한 성탄입니다. 이는 저의 블로그를 지속적으로 구독하신 분이라면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2016년 올 한 해도 많은 분들이 제게 연락을 주시고, 또한 연락을 주실 때 이미 이전 신앙과 다른 신앙적 안목을 가지고 고백적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 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보면서 올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많은 분들에게 진정한 성탄으로 자리한 사건으로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 블로그를 정성껏 운영하기는 하나, 시작 할 때 세상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하여 지금과 같이 많은 관심이 일 것이라는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작년 말을 기점으로 글로서만이 아니라 직접 만나는 분들도 생기고, 올 한 해 충실하지는 못했지만 강화도, 서울, 대전, 대구 등에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 말씀이 진정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말씀이라는 증거가 되기에 진정으로 감사드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제 이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만남을 이어온 분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는 못했지만 글로서 또 메일이나 다른 매체로서, 또 전화 통화로 만난 모든 분들께 이전과 다른 신앙적 안목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바람은 분명 땅에 떨어짐 없이 여러분들께 이루어질 것이라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는 저 같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된 복음이 이 글들을 보시고 안목이 새롭게 되신 분들에게 임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삶의 여러 모양 중에 맞이한 성탄절이 기쁘고 즐거운 성탄절이 되시기를 바라며, 내년에는 좀 더 충실하게 서울과 대전 등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힘써 볼 것을 약속드리면서 성탄 인사를 대신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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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샤머니즘(Shamanism)인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Date : 2016. 11. 13. 11:56 Writer : 김홍덕

샤머니즘은 

신(神)을 불러들이는 무당(巫堂), 곧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은 이상심리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신령, 정령, 사령 등)와 직접 접촉ㆍ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는 인물(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ㆍ종교적 형태로 나타난다.(《종교학대사전》, 샤머니즘, 한국사전연구사(1998년판))

라고 인터넷 위키백과에 나와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미신적 활동, 예를 들면 굿을 한다거나 부적을 붙이거나 가지고 다니는 등의 행동을 샤머니즘이라고 지탄한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고 있는 샤머니즘의 사전적 의미에 보면 예언, 탁선(신이 내리거나 꿈에서 신이 나타나서 말을 했다고 하는 것), 복점, 치병, 제의(제사 의복?)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신과 접촉해서.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사람이 접촉하는 것을 신접했다고, 귀신 들렸다고 하며 터부시 한다.


그렇다면 샤머니즘의 세계는 왜 그렇게 신과 접촉하려 했을까? 그러니까 신과 접촉하는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삶의 생사화복에 관하여 안정과 번영을 담보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살 동안 건강하고 부유하며 걱정거리 없는 삶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육신으로는 그 소망에 자기가 바라는 수준까지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육신의 능력 이상을 빌어 자기 소망을 이루려는 마음에서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육신이 도모하는 일, 그것이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어느 것이라도 그것을 바라는 바를 어디엔가 기대하려 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정립된 신론(神論)에 의하여 인정된 신에게 의지하면 종교가 되고 그렇지 않고 무당과 같이 정통적이지 않지만 세습되어온 민간의 방식에 의존하면 샤머니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명확한 것 같지만 엄청난 오류가 있다. 같은 문제를 어디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종교가 되거나 샤머니즘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범주를 보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들이 문명적으로 발전하면서 종교학, 신학과 같이 신에 대하여 학문적인 정의를 내리고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가진 문제를 그것에 의지하면 종교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뿌리도 결국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정립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힘든 삶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인간 이상의 존재에게 의탁해 왔는데 그 체계를 인간 스스로가 세우고 스스로 세운 체계 안에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탁하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들 스스로가 세운 종교적 논리 세계에 따르지 않고 종교적 논리가 수립되기 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샤머니즘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종교나 다 같은 조상이고 뿌리가 같고 같은 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되었던 샤머니즘이 되었던 사람이 그것에 바라는 것은 모두 육신으로 사는 인생 한 세상 자기가 바라는 일이들이 육신에게 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는 것은 같은데, 그 마음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종교 안에 있으면 좀 고상하게 보이고 좀 더 확률이 높다고 여길 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신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확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종교적 개념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도 함께 발전했다. 그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종교나 샤머니즘이나 다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교회에 가서 헌금을 했더니, 아니면 무당에게 복채를 주었더니 부자가 되었다거나 병이 나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다 미신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사회과학적으로 공부나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병이 나으려면 의학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기도나 헌금이나 수행을 하는 것은 과학 입장에서 보면 도진개진인 것이다.


그러자 일부 종교, 특히 기독교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창조과학회와 같이 신앙과 과학을 결합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성경의 일을 증명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종교가 더 우월하고 세상 친화적(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높은)인 종교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확률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어떤 신께 어떤 방식으로 인생의 문제를 의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학이나 신학이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예불하고 미사를 드리면 괜찮고, 그 범주가 성립되기 전 인생들이 의지하던 고전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면 샤머니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신이나 무당에게 의탁하느냐의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다니면서 하나님, 부처님, 천주님께 기도하면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천주님이든 간에 가서 인생이 가진 문제, 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신앙은 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물으시는 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너는 누구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같이 관계에 관한 질문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너의 문제가 무엇이냐?’, ‘네가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에게 제시할 공로와 소유가 무엇이냐?’와 같은 것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육신이 살아가는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사람이 거하느냐 아니냐를 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즉 정체성과 관계를 보시는 분이시지 육신의 문제가 무엇이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인 나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보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무당으로 대표되는 샤머니즘을 보자. 병을 고치려면 복채를 내라는 것, 산신령이 노하시니 무엇이든 드리라고 하는 것이 샤머니즘의 골격이 아닌가? 이것의 출발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답을 위해 육신의 무엇을 드리는 것으로 구성된 퍼포먼스인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샤머니즘인 것이다.


그러면 종교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샤머니즘과 다른 것이 없다. 동일하게 육신의 문제를 사삼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 안에 가지고 가서 종교가 정한대로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이 그것이다.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나, 공양미를 내면 아비의 눈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나, 가서 주기도문을 백번 외우면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것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없이 모두 자기가 믿는 신이나 신앙을 위해 육신이 가진 무엇을 드리면 육신의 문제 무엇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상한 샤머니즘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근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육신의 행함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고, 제사로 드리는 제물 태우는 냄새도 싫다고 하셨다. 한 마디로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또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행함이나 소유를 드림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산신령 같은 잡신 취급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인생이 존재하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자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서 취업이나, 사업이나, 결혼이나, 건강과 같은 것을 기도하고,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헌금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마음에는 분이 차지만 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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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승선 2018.11.19 10:57

    오랜만에 참으로 명쾌한 글을 읽었습니다. 감사드리며` 옮겨감을 혜량하소서.

    수정/삭제 답글

영성훈련, 신앙훈련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Date : 2016. 11. 2. 17:05 Writer : 김홍덕

지금 저의 블로그에는 로마서 강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로마서 앞부분에 있는 행위와 믿음에 관한 말씀을 이야기함에 있어 부각되지 않을 수 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젠 습관처럼 된 <신앙훈련>이라는 것이 행위와 믿음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야할 것 같아서 따로 이렇게 설명하려 합니다.



훈련으로 종(種)을 바꿀 수는 없다.



많은 교회와 신앙단체가 신앙에 대한 훈련을 합니다. 이름도 가지각색이고, 최근 들어서는 영어로 훈련 이름을 만들고서는 그 영어 단어의 첫 글자만 따서 약칭을 부르는 것도 많아서 설명을 듣지 않으면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한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요즘 성황 중인 이단 신천지에서도 많은 성경공부와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훈련, 영성훈련(이하 ‘신앙훈련’이라고 하겠습니다.)에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훈련>이라는 단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범위입니다. 흔한 표현이 아니라서 설명을 붙인다면, 훈련이라는 것이 (생명의) 종(種)을 바꾸어내지는 못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신앙훈련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명이 산 자와 같은 생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개를 훈련시키면 고양이나 다른 동물이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쩌다 개를 훈련해서 개가 고양이 흉내를 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흉내’고 ‘노릇’인 것입니다. ‘노릇’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유대인들에게 ‘선지자 노릇’한다고 하신 것을 생각하면 익숙한 표현일 것입니다.


훈련이란 어디까지나 이미 태어난 생명의 본성 안에서 그 생명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지 훈련을 통해서 다른 종으로 바뀌거나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훈련을 통해서 더 좋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맞겠지만 신앙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밝음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공로와 소유를 드리므로 이 세상을 살 동안 안위와 복을 받는 것으로 관철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제 아무리 신앙훈련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거나 구원을 받은 생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훈련은 살아 있는 생명이 받는 것.



또 하나 이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에게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훈련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생명체>에 사용하는 말이고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기계는 시운전, 업그레이드와 같은 말과 개념을 적용하지 기계를 ‘훈련시킨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신앙훈련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다 생명이 있지 그럼 죽은 사람이 훈련을 받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 숨 쉬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서 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한다고 또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고 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고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창세기에 말씀하신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된다는 것, 그래서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그런 축복을 받으려면 성경을 행동으로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신앙훈련을 통해서 성경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전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 아니라 세상의 왕이 되어서 아직도 육신이 죽지도 않고 살아 계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서 돌아 가셨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정말로 지금까지 살아 계셔서 지난 수천 년의 역사 편찬에 정보도 주시고 또 전쟁도 막고 하셨으면 되지 그만한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리석고 하나님을 뜻을 전혀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만이 생명이 있고, 훈련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전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담보받기 위하여 행동을 고치는 것을 신앙훈련이라 여겨서 성경을 읽고 수련하고 훈련하는 것은 주소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없는 존재니 의미가 없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의 존재가 훈련한다고 살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훈련은 종을 바꿀 수 없으니 말입니다.



훈련이 있으려면 먼저 생명으로 거듭나야…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훈련이 급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살았다 하는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훈련이라는 것이 생명에 적용하는 개념이듯 거듭남 역시 생명, 곧 어떤 세계에 있어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하려면 앞에서 이야기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그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이김의 법으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자기 삶의 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밑에 있던 백부장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고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백부장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백부장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는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즉 다른 생명, 거듭난 생명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부장은 어떻게 그런 안목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된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안에 심겨졌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에 따라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려고 시험 잘 치게 해 달라, 좋은 직장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몸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훈련을 받을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히 실패해서 버린 돌과 같은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지금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모습이 우리 심령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법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처음이고, 그 법으로만 생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이 된 다음에 그 생명의 풍성함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묵상도, 기도도, 훈련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훈련이 훈련다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