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전부 알아보지 못했다. 2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세 번째라고 하고 있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알지 못해서 자기 생업을 찾아 떠났고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찾아 오셨다.


요한복음 뿐 아니라 다른 성경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제자들이 잘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요한복음 21장에서도 고기 잡는 제자들이 바닷가에 서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거리상의 문제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는 단순히 거리상의 문제만은 아니다. 무덤에서는 아예 몰라 봤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금방 알아볼 수 없게 한 제자들의 안목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일이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 제자들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정체성을 보이시고,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자가 되기를 바라셨다.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 품속에 있는 의가 형상을 가진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 나타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아직도 땅에 계신다는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 살 길을 찾아 갔다. 육신의 안목,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보고 기대했던 그들의 안목과 가치관이 아직 남아 있기에 육신의 문제에 자기 삶이 회귀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볼까 생각했다.


신앙이란, 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있어 신앙이란 이 육신을 사용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더 근원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존재로서 인생을 살 것인가?’하는 것이다. How는 What이 정해지면 자동으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며 어떤 존재인지만 정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는 자연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혈연관계도 서로가 원수로 관계를 정리하고 나면 천하에 그런 싸움이 없다 싶은 싸움과 다툼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을 설명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그 보이신 내용인즉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가 육신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즉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같이 육신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지 보이신 것이다. 육신이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육신을 사용하는 법이고 육신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인생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종과 같이 섬기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섬기는 자리에 처했다는 것은 어떤 세계에 있어 패자가 되었거나 빚진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종이 되어 어떤 가치, 어떤 법에 있어 주인인 존재나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셨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인생들, 그리고 그 가치관을 가진 자들을 섬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가치관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끌려가신 것이다. 육신이란 그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그들의 의도대로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즉 나의 의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이 예수님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군사를 불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을 물리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 세상의 가치관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고 또 종이 되어 그들 앞에서 종과 같이 섬기고 심지어 나의 의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오직 그 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사람을 향한 뜻이 나타나게 하시기 위함이고, 그렇게 될 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을 못 박았던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된 것이다. 즉 이 육신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 되는 법아래서 살면 그 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목적이고 뜻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도 육신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육신의 먹거리를 해결하고자 생업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고기를 잡고 있으니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고기를 잡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하지만 고기는 없었다. 즉 그 삶에는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육신을 소비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어부에게 고기는 그 삶의 결실이다. 그들은 어부지만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삶은 그 직업이 무엇이라도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소득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결실이란 얼마나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소득이 없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와 생업이 어부였던 제자들이 육신의 삶을 떡으로 사는 것에 투자했지만 소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을 하셨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그랬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다. 오른편은 바른 편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실 때 오른손으로 붙든다는 말씀은 하셔도 왼손은 언급도 않으셨다. 오른손은 바른 손이고, 오른편은 바른 곳에 던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 여겨 살지 말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을 바른 것으로 알고 육신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먹을 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봤다는 것이다. 일어난 일은 육신이 먹고 사는 물고기가 많이 잡힌 일인데, 어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생업이 풍성해진 것일 뿐인데, 제자들은 이 일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택함 받은 제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을 믿어서 어떤 일이 나타났을 때에 주님을 알아보았다는 것, 그것이다.


제자들이 그들의 경험에 의거하여 던진 그물에 잡히지 않았던 고기가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던졌더니 잡힌 것이다. 이는 그들의 가치관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사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것이다. 바르다는 것은 존재가 자기 존재의 정체성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바른 것이다. 세상의 물건을 보고 바르게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만든 이의 용도, 그것을 사용하고자 기획한 사람의 의도에 따라 사용될 때 바르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고, 또 소득이 있는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늘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라고 사람을 도우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도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도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도우시겠다는 것이다. 그 결정체가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고기가 많이 잡힌 것을 보고서 예수님을 알아 봤다. 이것은 성경을 행위로 지키면 생업이 풍성하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주시다!”라고 했다. 우리 모든 일에 있어 무엇이 바른 것인지를 가지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바로 사용하는 이가 바로 주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 도구가 주인을 알아본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으면 생업이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만약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그 날 이후에 고기 잡을 때 마다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면서 죽을 때까지 어부로 살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이렇게 생업이 잘 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가 보는 대로 성경을 보는 병폐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이라 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떡이 풍성해질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 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찾아와서 그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은 인생이 바뀐다. 자기 육신을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에 소비하게 된다. 진정한 투자를 하는 것이다. 아니 오른편의 삶, 바른 삶을 살게 된다. 인생이 창조된 목적대로 살게 된다. 오늘 우리가 이 성경을 묵상하는 것의 결국도 이와 같이 되기 위함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떡으로 살기 위하여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이 육신을 오직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에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그 이유와 본질을 예수를 통하여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이시고 주님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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