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신 후에 하늘로 승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마태, 마가복음보다는 누가복음이나 특히 요한복음에 많이 기록되어 있고, 누가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행전의 시작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다는 것이나 특별한 내용 없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분부가 짧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모든 족속이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모든 성경의 말씀이 그렇지만, 정말로 성경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성경은 무조건 의미만 새기고 문자는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으니 세례를 주면 예수님의 말씀을 준행한 것이라고 하면서 논산 훈련소에서 급수차를 가져다 놓고 세례를 주는 것이 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게라도 세례를 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 지킨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을 준행한 것이 되려면 왜 세례를 주라고 했는지, 또한 세례를 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복음을 전한 사람이 세례를 받음으로 어떤 사람, 어떤 존재가 되도록 하는지를 알고 그것에 이르기까지 전할 때 그 사람이 자기가 받은 복음의 증거로 세례를 받고자 하는 고백이 있어 세례를 줄 때 비로소 세례를 주는 것이 되는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 (마태복음) 3:13-17 세례를 받으심.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과정 속의 그리스도 (9)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셋째 날 (1) - 바다에서 드러난 땅의 의미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 (골로새서) 2:8-15 세례로 죽고 살아남



그렇지 않고 세례라는 의식만 치렀다고 예수님의 분부를 준행한 것이고 여기듯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 된다고 한다면, 세상 끝날 까지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으니, 그렇게 세례를 베풀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 끝날 까지 죽지 않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문자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하신 의도에 있다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제자 삼으신 방법대로 제자를 삼으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의와 법이 아닌 것으로 따로 제자를 삼으려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새로운 교주가 되는 것이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과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분부한 것,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사람이 성경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보고 해석하여 전하는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보이시심으로 가르치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고, 그 의를 전하므로 사람들이 그 의로 인하여 제자로, 또한 세례를 받은 새 생명으로 살게 하라는 말씀이다.


세례는 물에 잠기는 것이다. 말의 어원인 ‘밥티스마’이 그 의미이고, 예식의 모양이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이 물에 한번 들어갔다 나온다고 세례를 받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교회에서 했든 어디서 했든 마찬가지다. 물에 수 천 번 들어갔다가 나와도 세례를 베푸신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례 예식의 방식을 가지고 교단이 갈라졌다는 것은 정말로 우스운 것이다. 세례의 본질이 예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까지 구분한답시고 침례로 바꾸는 발상은 오히려 경이롭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은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당연히 물속에 못살지 무슨 소리냐 하겠지만, 사람의 육신이 물에 들어가서 숨을 쉴 수 없어서 그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물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듯,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도 어떤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할 때 구원이 있는 것을 세례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 고백이 주목적이고, 그 증거로 예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에 들어갔다 오고 세례증서가 있어야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은 사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가 아닌 곳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물속에서 살 수 없는 육신이 물에 들어가 보면 물속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듯이 깨닫고 인정하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세례를 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물은 성경에서 많은 부분 말씀으로 의미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써의 물은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에 관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의 몸이 잠기는 큰물과 바다는 세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창세기에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이어 홍수가 났다고 했는데, 이는 궁창 위의 물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수도와 같이 사람이 먹는 물, 곧 사람이 먹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말하고, 궁창 아래의 물은 하수도와 바다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이 모였으나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물, 곧 사람이 자기 정체성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세상의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물에 잠기면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세례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물이 아니라 세상의 물이나,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것이 섞여진 혼합되고 변질된 것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을 먹거나 그 안에 있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물속에 잠기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셔서 죽게 되심과 같고, 물에서 나오는 것은 부활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몸소 보이신 분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예수님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 곧 그 분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신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라고 하신 것은 예식으로서 세례나 준다고 제자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하면 사람들이 세례 받은 고백을 하고 스스로 세례를 받고자 할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너희가 제자가 되었듯, 너희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를 본 제자들, 그리고 또 그 제자를 본 제자들에게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일이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있을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제자가 되고, 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시면서 인간의 정체성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의를 보이심으로 자신들이 그것을 보고 제자가 되었듯이 제자들도 그렇게 십자가를 지듯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 되어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 인간의 본 모습이라는 것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님과 같이 그들을 본 사람들의 심령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또 하나의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로 거듭나고 부활하는 그런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지속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전하신 복음의 본질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마태가 보았고 자기 안에 감동이 있어 기록한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인 것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