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기독교와 다른 종교가 다르다는 차별적인 기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물론 그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들이야 별로 없겠지만, 부활이 가진 의미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지금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 그것이다. 단순히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부활한다는 것만 믿고 있다면, ‘화장한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와 같은 기막힌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자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고, 대제사장들은 행여 예수님께서 살아나실까 하여 무덤을 돌로 막고 또 파수꾼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제자들보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였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에 대하여 가장 기대한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자들이었다.


여자들은 예수님 당시에 사람의 수에도 세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이것은 육신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성경을 문자대로만 본다면, 그러니까 성경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여기는 신앙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성경을 문자대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여자에 대하여 수에도 세지 않은 것은 여자가 관점이 아니라, 남자가 관점이라서 그렇다. 이 역시 육신으로 남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가문은 남자의 성을 따르는데, 그것은 남자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육신의 남자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이 육신으로 볼 때 남자와 같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 여자는 아들을 얻는 존재다. 여자는 자신의 성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이다. 동양에서는 아니지만 서양에서 결혼을 하면 여자의 성이 남자의 성을 따르는 것이 종속된 것 같지만,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여자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지만,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모두 여자이고,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인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가능성과 여지와 역량을 가진 존재가 바로 여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기대하고 무덤에 갔다는 것은 아주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그것은 여자들이 아들을 얻고자 하는 마음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을 바꿀 수 있는 거듭남과 부활을 소망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음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정체성이 되어,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되고,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은혜를 입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를 더 본다면, 여자들이 찾아 간 곳은 무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무덤 근처에도 오지 않았는데, 여자들, 곧 남자를 만나 자신의 정체성이 변해야 하는 간절함이 있는 사람, 즉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궁전이나 성전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다는 것이다.


무덤을 찾아 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 자리가 무덤이라는 것이다. 이 무덤은 그냥 무덤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이다. 즉 이 무덤은 그리스도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설명하는 무덤이 바로 예수님의 무덤이다.


그 무덤에 예수님을 만나러 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곳에 있다는 것은 그 장소와 존재가 같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은 곧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것이 인정이 된다는 것이다. 즉 자신들의 신앙 정체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은 무덤에 오지 않았다.(나중에 오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것에 동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그렇게 죽였으니 이건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다.


여자들은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한다. 즉 세상의 가치관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되고 죽어 장사지내게 될 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자신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주님은 거룩한 곳에 계시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이들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 심판하여야 한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외면 받고 손가락질 받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는 거룩한 사람들인데 신앙도 없고, 지옥 갈 죄인들이 자신들에게 도전한다며,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않고 오히려 죄인 취급하고 심판하는 뻔뻔함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것이 문제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인데 세상의 가치관으로 그 분을 죄인 삼을 때 예수님은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못 박히시고, 죽으셔서 장사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신앙인들은 완전히 그와 반대다. 교회 세습에 대하여 여론이 들끓으면 ‘하나님의 일을 몰라서 그렇다’고 하고, 종교인 과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하나님의 일은 세상일과 다르다’고 한다. 그런 모습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을 물리치는 모습이지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다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들과 같이 자기의 의가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을 만들어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이들이 아니다. 예수님의 무덤에 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데 있다. 여자들이 예수님을 무덤에서 찾으려고 갔는데 정작 예수님은 그곳에 계시지 않고, 정말로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가시고 천사가 그 자리에서 여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증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찾아 무덤에 온 여자들의 신앙이 부활신앙으로 바뀌는 것이다. 무덤에서 만나려 한 예수님을 부활한 주님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한 예수님과 만난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이 여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을 무덤에서 만나려는 사람, 그 사람이 육신으로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예수님의 죽음과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한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 앞에 죄인이 되어 죽게 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예수님을 만나려 한 사람들, 그들이 가진 그 마음과 신앙이어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부활이 자기 자신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 앞에서 여자이고, 그리스도 앞에 신부인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심령이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부활이 자신의 신앙이 되는 것이고, 자신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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