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과정에서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가시관을 씌우고 명패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 붙여 조롱하였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 명의 강도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괜한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것은 운명이다. 그리스도라는 운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자 하는 이의 운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본 받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붙었다. 군병들은 조롱하는 말로 붙였겠지만, 유대인이란 찬송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들의 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에 합당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도 ‘주여! 주여!’한다고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과 같이, 사람들 사이에서도 누군가가 누구를 찬양하는 것과 그 찬양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소유와 공로에 대하여 구하고 때로 얻었다고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 곧 찬송하는 이들의 왕인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에 맞게,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고 찬양 드리는 자들의 왕이라는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위험한 것에서 구하심과, 실수하여 큰 손해를 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게 생각나게 하시는 것과 같은 것과, 사업이 잘 되는 것, 건강한 것,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 역시 하나님께서 모두 주관하시는 것이고, 잘 풀리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본질적인 역학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사람의 육신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 육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신 벌을 받는 것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기적을 보이셔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문제는 늘 머리에 있고, 손과 발에 있고, 옷에 있다. 즉 늘 생각대로 되지 않고, 몸이 맘대로 되지 않으며, 그런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좋은 신분을 옷과 같이 갖추려 하는데 잘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구하는 내용은 절대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과 같이 건강이나 경제적인 문제나 시험에 합격하는 것과 같은 것에 관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가시관도 녹여버리고 못은 튕겨내 버리고 옷은 제비뽑기로 빼앗기지 않는 아이언맨의 슈트 같은 것이 되는 기적을 보이시고 내려와야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런 육신의 문제를 지고 갈 때 인생의 십자가라고 하니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심이 제대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조롱도 받고, 채찍질도 당하고 침 뱉음도 당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억울함이나 분함을 해결하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거나 그런 자리에 처하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도록 기도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살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십자가에 함께 달린 두 강도의 요구도 그것이었다. 예수님께 ‘네가 정말 메시아이면 십자가에서 자기를 구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 육신의 문제를 구하는 이들은 다 강도와 같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강도나 제사장이나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육신의 문제를 간과하고 버리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냐 하겠지만 그것은 영지주의다. 육신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가진 심령이 표현되는 도구이다. 즉 육신의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본질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심령의 정체성에 따라서 육신의 모든 것이 표현되고 종속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심령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면 육신의 문제는 당연히 그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경제적으로 힘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벌 주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 마음에 하나님과 세상과 인간의 정체성이 분명해 지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삶의 결과로서 경제적인 문제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이러한 법을 아는 사람은 결과에 순종하는 마음도 당연히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준 정체성을 알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아는데 그런 관계에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은 인간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의 정체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가를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가치관 앞에 인간이 서면 다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그 가치관은 유대인과 로마의 가치관이다. 유대인의 가치관은 인간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가치관이고, 로마의 가치관은 공로와 능력의 승자가 독식하는 가치관이다. 


즉 유대인과 로마인은 인생을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린 것 같이 곤고한 것으로 보고, 그 상황에서 가시관을 쓴 듯 생각으로 그런 자신을 구하지 못하는 인간, 손과 발이 못에 박힌 듯 자신의 행위로 구원하지 못하는 인간, 또 옷과 같이 인간의 연약함을 감추는 신분과 고상함이 없는 인간을 죄인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죄인의 형틀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달랐다. 원래 인간은 그럴 수 없게 지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셨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자기의 인생과 육신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인간은 육신이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을 십자가와 같은 문제와 짐으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자신을 만들지 않았으므로 자신의 존재 목적이 자기 안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진 인생이라는 이 십자가를 어떤 이는 죄인의 틀로 보듯 인생을 부끄럽게 여겨 숨기고 제어하면 할수록 의롭게 보고, 하나님은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요 정체성으로 아는 이를 아들로 여기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정체성이 인정되고, 그 정체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듯, 또한 말씀이 육신이 되듯,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본성이 되어 그 사람의 모든 삶을 주관하게 되고, 그러므로 육신의 삶이 경건하고, 성실한 삶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단순히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구원이 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듣고 읽을 때에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 자신이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만들지 않았으므로 자기가 가진 인생이라는 연약함인 그 십자가가 자기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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