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다시 오실 때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심판을 하시되, 왼편과 오른편으로 사람을 나누고 왼편에 있는 이들은 영벌에, 오른편에 있는 이들은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말씀을 하신다. 왼편과 오른편, 그리고 양과 염소. 영벌에 들어가는 사람은 염소와 같은 사람으로 예수님의 왼편에 선 사람들이고, 양과 같은 사람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선 사람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특이한 것은 어느 편에 선 사람도 자신이 어느 쪽에 서게 될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우리가 언제 주를 영접했나이까?’ 반문하고, 왼편에 선 사람은 ‘우리가 언제 주를 외면했나이까?’ 반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반문에 임금 곧 예수님의 대답은 ‘지극히 작은 자’를 어떻게 대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라는 사람은 키 작은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적은 사람? 도무지 어떤 사람이기에 이들이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정말로 핵심이 아닌가 싶다. 이것은 요즘말로 한다면 ‘을’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 세계, 어떤 관계에 있어서 아주 작은 자, 그 세계의 의와 기준에서 가장 작은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다.


수학의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는 “0”점 받은 사람이고, 신앙의 세계에서는 신앙 없고 도무지 신앙적인 규례라고는 전혀 지킨 적이 없는 그런 사람, 도덕이라는 세계에서 보면 싸가지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 돈의 세계에서는 파산한 사람, 거지와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세계에서 작은 자가 필요로 하는 것, 그것을 대접한 사람은 오른편에, 그것을 외면한 사람은 왼편에 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러 가시는 길에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 그 지극히 작은 자가 필요한 것을 대접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고 하나님을 모르고 모욕한다고 죽여 버린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모르는 작은 자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목숨을 대접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의 세계의 지극히 작은 자, 곧 죄인이요 사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하나님의 의로서 대접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작은 자들, 그들의 배고픔과 목마름과 나그네 됨은, 모든 인생이 왜 사는지, 자신이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그것 자체이기에, 예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창조하셨는지 그 뜻을 사람에게 알게 하신 것이야 말로 모든 배고픔과, 모든 헐벗음과,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해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에서 의로운 것과 의롭지 않은 것을 가늠하고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세계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같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과 같이 그 사람이 작은 이유, 가지지 못하고 모르는 그 이유의 해갈해 주기 위하여 수고한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가 심판 날에 예수님의 오른편에 서게 할지 아니면 왼편에 서게 할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약자에 편에 서는 것을 의롭게 여긴다. 그것을 사회의 정의로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은 좀 다르다. 어떤 것에서 다른가 하면, 가진 자로서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과, 가졌지만 도리어 없는 자 보다 낮은 자리에서 낮은 자를 섬기는 것의 차이다. 이것이 뭐가 다른가 싶겠지만, 이것은 아주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수학 교수나 선생님은 배우는 학생들보다 수학에 대하여 더 능통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교수나 교사가 배우는 학생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전해 주는 것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치셔야 했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가르치셨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교수나 교사는 그 지위가 언제나 학생보다 위에 있다. 수학이라는 세계에서 항상 큰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섬김은 다르다.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 보다 더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수학으로 친다면 다빈치 이상의 레벨(?) 하지만 그런 비교조차 불가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하여 분명히 아시는 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면서, 하나님의 뜻을 몰라 죄인인 인생들이 주장하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하나님을 모른다며 오히려 죄인이 되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섬김이라 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다.


수학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한다면, 수학박사인 교수가 어린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치는데 학생이 교수를 보고 “네가 수학을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 하면서 교수를 해임시켜 버린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다. 그러는데 예수님께서는 묵묵히 털 깎는 자 앞의 어린 양과 같이 묵묵히 끌려가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더욱이 마음만 먹었다면 천군천사를 불러서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본성이 그게 아니기에,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생명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사람들 사회에서 약자를 돌보는 일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것조차 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에 매몰된 사람보다야 백번 나은 것이지만.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예를 들어 무료 급식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음식 맛이 왜 이따위냐?”고 행패를 부렸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하는 것으로 가늠할 수 있다.(아마 실제로 그런 일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졌다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는 사람에게 ‘죄송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수학선생이 아이를 가르치는 마음으로 한다면, ‘굶는 사람 먹여 주려는데 뭐하는 것이냐?’할 것이다. 만약 그런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가진 자로서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졌다는 지위는 놓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보다 훨씬 심하다. 굶는 사람 법 먹여 주는데 밥이 맛없다고 투정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왜 사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람 지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 지으신 뜻과 의를 전하려고 예수님을 보내서 그 뜻을 전하는데, ‘네사 무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지랄이냐?’며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하면서 응징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로 죄인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 진정한 소자인 죄인들이 크다고도 표현하기 힘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데 그들의 뜻대로 달리셨다는 것이다. 즉 소자들의 원하는 대로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서 더 알게 되고, 더 밝아지고, 더 가지게 되면 점점 높아진다. 의를 굽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무료 급식을 하는데 밥 맛 없다고 투정하는 노숙자가 못 마땅하게 보이는 마음 없이 섬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일단 ‘베푸는 자’, ‘더 아는 자’라는 지위는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가진 자로서 봉사하는 것 까지는 해도, 봉사하는 그 자신이 무시당하는 것을 말없이 수용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우리가 언제 주를 외면했습니까?’ 항변하는 사람들도 주님을 공양했다고 했다. 바로 그들의 공양이 가졌다는 것을 유지하고 나눈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공양한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의지를 가지고 했고, 자신이 계획했으며, 자신이 공양할 때에 이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임금의 말에 자신들의 행적을 기억해 낸 것이다.


반면에 오른편에 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 주님을 공양했는지 몰랐다. 자기들이 언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했는지 몰랐다. 그것은 자신들이 대접한 사람들이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과 자신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신들이 한 것을 기억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이 대접할 때는 그것이 대접이라고 생각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준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임금이 이야기 하는 지극히 작은 자와 어떻게 다른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다.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죄인과 같이 예수님도 죄인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접한 지극히 작은 작, 하나님의 의 앞에 온전한 죄인들과 예수님의 신분이 같아져 버린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이 오른편에 선 자들은 자신들과 지극히 작은 자와 차이가 없어지는 자리를 순종한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것이다.


정리해 보면 지극히 작은 자는 가난한 자와 같은 약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포괄적으로 보면 어떤 세계에서 약자다. 지식의 세계에서는 무식한 사람, 경제의 세계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님 의의 세계에서 지극히 작은 자, 곧 죄인을 말한다. 이 죄인과 자신과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곧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 것이다.


그것은 오른편에 선 자들이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들이 지극히 작은 자 대접한 것을 몰랐던 것은 그들이 대접한 사람이 지극히 작은 자인 것을  몰랐던 것이고, 또 자기의 행위가 대접하는 것임을 몰랐던 자들이다. 즉 베풀거나 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나오는 본성대로 자연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것이 대접한 것인지, 지극히 작은 자를 대했던 것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보여 주신대로 의인이 죄인이 되는 세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그것을 특별하게 여지 않는 본성과 같은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이 숨 쉬기 위하여, 숨 쉬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과 같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어떤 세계에서 나를 죄인 삼아도 그것을 수용함으로 대접하는 것이 본성인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는 것이 기억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자신의 삶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의 우편에 서는 양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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