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다시 오는 것을 예비하라고 하셨다. 그 날은 노아의 때와 같고, 두 사람이 밭을 갈다가 한 사람만, 두 사람이 맷돌 갈다가 한 사람만 인자가 오시는 것을 맞이하는 자리로 데려갈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예비하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재림은 징조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무화과의 잎이 연해지고 가지가 무성하면 여름이 올 것이라는 것을 알듯이 징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에서 이 세대는 예수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계시던 그 시절의 시대를 말한다. 달력, 곧 크로노스적인 시간으로 2,0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노라하면서 아직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고 믿고 있으면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천지는 없어질 수 있어도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단편적으로 본다면 지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첫째 아직 자기 심령에 온전한 예수님의 생명이 임하지 않은 사람이고, 둘째 모든 가치관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본질로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세계는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세계이므로, 사람의 심령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재림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재림, 즉 정말로 사람의 육신의 눈으로 오시는 주님을 보는 날도 오겠지만, 그것 역시 그 마음에 내용이 있는, 예수님의 재림과 생명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의미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심판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나의 삶의 이유와 존재 목적으로 다시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재림이 없는 것은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다 소용없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강아지 인형을 아무리 실제 같이 만들어본들 그게 살아있는 강아지 같겠는가? 그것이 그럴 수 없듯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그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라는 것을 전하러 오신 그것이 자기 안에 없는데 금식을 하면 무슨 소용이며, 전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들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이 임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임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징조가 있다. 사람이 열심히 살지만 어느 날 왜 사는지 의문스러워지는 날이 온다. 이것은 반드시 인생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들 사는 일이 이상하게 안 풀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목사로 부르신 것이라고 생각해서 신학교에 입학하기도 하는데, 그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이다.


신학이 공부하고 싶고 목사가 되는 일에 어떻게 육신의 먹고 사는 일이 안되니 목사가 되라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말로 어이가 없다. 왜냐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잘 되지 않으면 목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그 사고방식은 먹고 사는 문제가 얼마나 삶의 목적이고 본질로 여기면 그렇겠는가 싶기 때문이다. 정말로 신학을 하고 싶다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의 도움을 위해서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면 결국은 먹고 사는 한 방편일 뿐이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하여 목회를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도 뭐 그리 장한 일은 아니다.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듯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주고 그것이 사람 마음 안에서 생명이 싹이 되듯 전해져야 하는 것이지, 목사라는 신분을 기반으로 사람에게 주입식으로 전하는 복음은 결국 강아지를 낳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잠깐 딴 데로 갔었는데, 예수님의 재림의 징조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자신이 인생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이 망하는 일이다. 그것이 해가 어두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본질이라 여겼던 것들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곧 예수님께서 자기 심령에 오실 징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징조는 아무 이유 없이 오는 것은 아니다. 즉 그런 징조가 올만한 원인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때 인생의 본질이 새롭게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금 예수님의 이런 모든 말씀은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 과정에서 하시는 말씀이다. 즉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텐데 그것을 보면 인자가 재림할 것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심문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자 다 도망 가버렸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자기가 무슨 상관이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그들이 믿었던 세상이 망한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그들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규정했던 그 세상, 그것이 망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징조를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인데 그것이 징조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는 것을 보면 제자들 너희 마음에 가지고 있는 너희의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한 너희 마음 안에 하나님 아닌 세상의 임금으로서의 예수님이 계셨던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즉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는 것이 그것임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단 한 가지의 주제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성품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표현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이 깨닫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요 존재 목적이고 삶의 의미라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것이고 성경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그것을 전하셨다. 그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다시 오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자기의 의미로 다시 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의 내용이고 본질이다. 그것이 언젠가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림의 징조는 자신이 그것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알려면 십자가가 온전한 의미로 자기에게 임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버스 차비 대신 내어 주듯이 내 죄를 대신 십자가에서 갚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 세상과 자리에서 떠난 것임을 알도록 원래 자리,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셨던 그 모습을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그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이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것으로 비춰지기 시작하면 자기가 그날까지 전부로 여겼던 세상은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의 전정한 징조는 십자가와 그 십자가가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뜻하신 의미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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