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4:1-6 소금 같은 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3. 5. 17:22 Writer : 김홍덕

은혜 안에 있다는 것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보낸 서신의 마지막의 인사말을 앞에 두고 끝으로 한 권면은 '너희의 말을 은혜 가운데서 소금과 같이 하라'고 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사람의 말은 정말로 신기한 것이다. 생물학적(?),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점은 제쳐두더라도 말이라는 것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는 것이다. 이는 권력자가 말로 무엇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 하는 말들이 서로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


말은 우선 표현이기 때문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의와 생각을 대변한다. 정치적인 말은 그 사람의 정치적 성향을 나타내는 것이 그렇듯,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그 사람의 안목이 존재론적인지, 아니면 방법론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소유에 관심이 있는지도 다 사람의 말로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이 삶을 대변하는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면 은혜 가운데서 하는 소금과 같은 말은 어떤 말인가? 그러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말이든 어떤 것이든 사람이 구현하거나 또 할 수 있는 모든 능력과 활동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예외 없이 사람이 존재하는 목적 밖의 일은 없다는 것이다. 스마트폰 안에 있는 기능의 어떤 것도 사용자로 하여금 스마트한 정보사용의 목적 이외의 기능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마트폰으로 사람을 때리면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도 사람의 존재 목적 안에서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그 외의 것으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존재 목적이 바로 사람이 은혜 안에 있는 것이고, 사람이 받은 은혜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표현하는 형식으로 낙점을 받았다는 것,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의 어떤 요구에 상관없이 그러니까 이유 없이 거저 주신 것이기 때문에 또한 은혜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은혜가 되려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태어나지 않음 보다 육신을 가진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은 다 같은 궤 안에, 같은 세계의 같은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신 삶이 감사하지 않은데 이 삶이 은혜로울 수 없는 것이다.


어쩌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더 나아졌다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사람에게 은혜로 주신 분이 아니다. 그런 것은 다 부수적인 것이다.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 충전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람이 어떻게 모든 순간 모든 말을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성경에 있는 말만 하고 또 사람에게 좋은 말만 할 수 있겠는가 하겠지만, 그것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지 않고 하는 말을 기준으로 보면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집에 키우는 강아지도 귀여운 짓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데나 똥 싸고 오줌 싸는 것 까지 다 강아지를 키우는 재미 안에 혹은 일로 두지 않으면 강아지를 키울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말이나 모든 행동도 언제나 주를 위하여 해야 한다고 하면 모든 말이 다 성경에 있는 말이어야 하고, 또 사람에게 어떤 상황에 무관하게 좋은 말만 하는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존재론적 관점이 아니라 행위 규범에. 형식에 매몰된 관점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항상 기뻐할 수 도 없고, 범사에 감사할 수 없고,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없으며,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은혜 안에서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이 먼저 은혜 안에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비유컨대 회를 내어도 은혜로운 말이 될 수 있다. 이는 '화내는 것도 은혜다'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화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왜 화를 내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 생명의 본성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소금 같은 말



또한 말은 분명한 번지가 있다. 즉 같은 말이라고 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말이다. 이것을 보면 말은 분명한 주소가 있는 것이다. 주소를 영어로 addr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toward를 의미하는 ad와 direct인 dress가 결합된 단어이다. 즉 주소란 목적지를 두고 그 방향을 향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말이란 것이 바로 그렇다. 말이란 것이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 말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은혜 가운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그런 의미를 알 수 있다.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 자리에서 자기에게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은혜 안에서 하는 소금 같은 말이다.


알고 보면 사람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사람다운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것이 너무 거룩해서 어떤 순간에도 사람에게 은혜를 끼치는 것과 같이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이 자기 자리에 맞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상태대로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자기 자리에 맞게 말을 하는 것의 시작과 모든 것은 사람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자기에게 적합한 말을 하고, 자기에게 적합한 말을 할 정도로 자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대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영광스런 은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말을 소금같이 한다. 소금이라는 것이 맛을 내고,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 안에 감동이라는 맛을 내게 하고, 또 사람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리에서 벗어나는 부패함을 방지하는 것에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소금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런 말은 반드시 고운 말이나 부드러운 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엄한 꾸짖음도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욕도 할 수 있을 수 있다.(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달성하듯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 말이나 막 해도 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말로는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할 수도 없고, 마치 소금을 너무 많이 쳐서 음식을 버리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말이 얼마나 주소가 있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예를 들어본다면 그것은 죄에 관한 것이다. 죄는 시인하는 것이지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죄는 스스로 깨우쳐서 고백하고 시인할 때 주소가 제대로 된 것이지, 죄가 있다고, 또 그것이 보이고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일일이 시시비비를 따지고, 또 교회 안에서 그것을 책망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말의 번지가 잘못된 것이다. 즉 소금과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를 시인하게 하는 것은 어떤 교훈되는 것을 보고, 마음에 찔림을 받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에게 정치적 해방을 기대하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아셨고, 또 예수님이 잡히시면 다 도망 갈 것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것을 나무라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다만 몸소 십자가를 지심으로 제자들 스스로가 그것에 대한 시인과 고백과 회개가 있게 살아내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말은 참으로 간편한 것이기 때문에 남의 잘못이나 부족한 것을 지적하고 훈계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은 너무 쉬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간편하게 말로 그러는 것은 그 말이 아주 좋은 말이라도 소금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것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라는 것이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말도 감사함이나 기도함과 같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이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생명이 소금 같은 생명이면 어떤 말이라도, 또 어떤 톤의 어떤 감정이 실린 말이라도 다 은혜 안에서 소금 같은 말을 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말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게 한다면 아무 말이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진 목적을 잘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말이 아니라 사람이 보고 그 마음에 찔림을 받는 사랑의 표현이 동반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것 없이 말로만 하는 것은 그냥 소리 나는 꽹과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사람이 은혜 안에 있어 소금을 고르게 함과 같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의 생명이 된 사람이 삶으로 사랑하고 그와 함께 해 가는 말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바울사도가 권면하는 모든 것은 다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온전히 있으면 일어나고 할 수 있고, 아니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모든 것을 보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 이외에 어떤 것도 그 안에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순전하게 표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으로 신앙을 훼손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골로새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사도가 편지를 하고 있는 것이 이 골로새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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