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 교회의 교인들에게 끝인사를 해가는 바울 사도의 권면에, 계속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한데 이는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의 말씀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은혜를 입었을 때 감사하게 된다. 그렇다는 것은 은혜를 베푼 사람의 은혜가 자신에게 은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주신 은혜가 나에게 절실하고 나에게 은혜가 될 때 그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런 감사함이 자신에게 있었다. 그리고 여러 교회의 성도들에게 감사하라고, 특히나 항상 감사하라고 권면한다는 것은 자신이 권면하는 성도들도 자신과 동일한 감사의 이유가 존재하고 있고, 그 이유에 상응하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은혜가 항상 있기 때문에 항상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사람, 감사함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은혜가 항상 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있는 은혜가 있음을 알고 그것이 자신에게 정말로 은혜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취업이 되면 감사한다. 취업을 감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취업이 은혜가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취업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빈번하다 쳐도 하루에 한번 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가면서 겪는 일에 대한 감사는 아니다.


어떤 관점에서는 매일 겪는 일들은 다르지만 그런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므로 매일 있는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항상 감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굉장히 근접한 생각이지만 우리가 삶의 형식에 대한 절실함이라는 것은 '항상' 이라고 할 정도로 연속적이지 않다. 오히려 어떤 날은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 취업과 같은 삶의 형식에 관한 은혜이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하는 것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진정한 감사, 항상 감사하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서 감사한다는 것은 적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을 시작할 당시 스스로는 몰랐고, 또한 스스로 인생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자아를 주시고 인생으로 살게 하셨다는 것, 그 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바로 항상 감사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을 가지게 되면서 살아가며 겪는 일들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께 많은 감사를 드리면서 살았지만, 그래도 늘 삶은 곤고하고 또 육신의 일이라는 것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틈바구니 안에서 어쩌다 간절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에 한 없이 기뻐하기도 했고, 또 어떤 것은 내키지 않는 결과지만 그래도 감사하라고 하시니 감사한다고 말은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한 감사, 하라고 해서 하는 감사는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누적되면서 마음 안에는 '그래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라는 생각을 떨치기 쉽지 않았다. 삶이 곤고해 질 때면 죄가 될까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으니 처음부터 이 삶이 없었더라면 상은 몰라도 죄도 없었을 것이니 그랬더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다.


감사함은 감사하다는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 대한 만족함이 있어야 한다. 서울대에 가고 싶은 사람에게 그저 대학에 합격했다는 것이 감사한 일은 아니다. 대학을 가고자 하는 것이 은혜의 전부라면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쨌든 반쪽 감사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만족이 없는 것이고 항상 감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항상 감사한다는 것은 이 삶 자체가 만족스럽고, 태어나지 않음 보다 더 만족하고 은혜롭고 감사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의 감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항상 감사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감사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감사한 사람을 말한다. 즉 그것은 자신의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가 자신의 간절한 필요 곧 채워졌을 때 만족하고 감사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지 않은 것 보다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이 더 감사하다는 것은 정말로 삶에 대한 만족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삶의 질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삶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양하고 어떤 것은 자신으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나서 곤고해 지더라도 그런 모든 일에 대한 의미가 자신의 존재 이유 곧 태어나지 않음 보다 귀하고 좋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겪는 문제의 해결이나 삶의 필요가 채워지는 표면적인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와 한계와 어려움을 겪는 삶 그 자체가 자신에게 의미가 있고, 자신의 간절한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감사를 알고 또 항상 감사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삶 전체가 감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를 감사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지으신 이의 목적이 자신의 간절한 욕구와 일치하는 사람이 가지는 정말로 구분된 삶이다. 구분된 것을 거룩함이라고 할 때 자신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그것에 감사한다는 것은 정말로 거룩한 마음이고 거룩한 사람이다.


자신의 원대로 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목적을 생각하기 이전에 살아가는 문제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고 그런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감사하는 것도 귀한 것이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한 감사가 귀하긴 해도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그런 일이 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그 있는 문제들도 늘 만족할 수 있는 상태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삶의 모든 것을 감사한다는 것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중에 항상 감사하는 것은 불행하고 또는 만족하지 못한 결과를 손에 쥐고서도 '이게 어딘가?' 라며 감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진정한 감사, 항상 하는 감사, 자신을 존재하게 하심을 감사하는 것과는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가장 근간은 자신을 존재하게 했다는 그 자체가 감사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그렇게 생각하려 한다거나 그런 신념을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만족이 없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즉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것이 자신에게 진정한 만족이 될 때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 되는 것이다.


그 감사함이 있을 때 비로소 사람은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감사한 사람이니 존재하는 한 항상 감사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살아가면서 겪는 일이 어떤 기준으로 어떤 평가를 받는다고 해도, 그 삶의 모든 모양이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 자체에 감사하는 것이므로 그 감사는 진정으로 참되고, 맘으로는 불만인데 감사하는 것과 같은 아쉬움도 없는 그런 감사함이고,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감사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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