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귀신 들린 자의 회복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38 Writer : 김홍덕

성경에는 의외로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말씀이 많다. 마태복음에만 해도 그냥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고 언급한 구절 외에도 8장에서 돼지 떼로 들어간 귀신 들린 사람의 일과,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9장), 또 귀신들려 눈  멀고 귀머거리 된 자(12장), 가나안 여자의 딸(15장), 또 변화산 밑에 데려온 아이(17장) 등, 많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귀신에 대한 논쟁을 하기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새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하는 일에 이르기 까지 많은 귀신 이야기가 나온다.


중풍병자는 머리에 생각이 있지만 그것을 몸이 받들지 못하는 상태라면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것은 몸은 멀쩡한데 머리에 생각이 귀신에게 점령당한 즉 그 생각을 빼앗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풍병자는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지만, 귀신 들린 자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도 쇠사슬로도 제어 할 수 없다고 했고, 변화산 아래에 데려온 아이도 자기가 통제가 안될 정도로 움직임이 많아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고 하셨다. 이처럼 귀신이 들리면 그 머리의 생각이 빼앗겨서 자기 몸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이다.


머리가 빼앗겼다는 것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제라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목적 안에 두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력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힘을 어떤 목적 안으로 가지고 오는 시설인데, 만약 그것이 통제를 벗어났다면 그것은 전기를 발전시켜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목적을 벗어나서 오히려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아니면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상태를 통제를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 지진이 났을 때, 원자력 발전소가 크게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때 그 원자력 발전소들은 귀신들린 자와 같이, 엄청난 원자력 활동은 했지만, 원자력 발전소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목적에서 이탈해서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 발전소들의 설비가 원자력이라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통제를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목적이 상실된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도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몸의 기능은 오히려 극대화 되었는데, 머리가 빼앗겨서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뛰어들게 되는 상태가 바로 귀신 들린 상태인 것이다.


거라사(마 8장에서는 가다라)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막 5장)은 무덤 사이에 살고, 쇠사슬로 묶어도 그것을 끊어 버릴 정도였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 같이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기 힘든 일들인데, 그 사람에게는 일상과 같은 일들이었다. 사람이 쇠사슬에 묶이면 움직이지 못해야 정상인데 이 사람은 그것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는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전달되지 않아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는 반대로 머리의 생각이 정상이 아닌데 몸은 괴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적인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비한 능력을 사모해서 가진다고 해도 그것이 가진 목적, 즉 머리를 빼앗긴 상태로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면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 그렇다.  마태복음 8장 28절에 보면 귀신들린 자들이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 하더라”라고 했다. 즉 귀신 들린 자의 상태와 같은 방법(길)으로는 사람들이 다니기 힘들다는 말씀이다.


이는 신앙 세계에서 남이 하지 못하는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는 것이 더 예수님을 닮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마치 그들에게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렇게 기적을 행하여야만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 기적은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도 건지지 못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자리에서 구원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이신 것이다.


신비한 일을 일으키려 하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막 5:7)이라고 알아 봤다. 당시에 아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을 때 인데 이미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아야 하는 귀신 들린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해도, 귀신 들린 자가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라고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과 귀신 들린 자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보이려 오신 분이기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함으로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과도, 예수님과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괴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누가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마음이 괴롭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신비한 능력이 있을수록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라서 괴로운 것이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몸을 돌로 상하게 한다고 했다. 사람의 말이라고 해도 메시지가 없으면 그것은 소리일 뿐이다. 귀신 들린 자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메시지가 없는 소리라는 것이다. 메시지는 말하는 사람에게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들을 때 의미가 있어야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는 아니지만 2009년에 개봉된 중국영화 <바람의 소리>라는 영화가 있는데, 반일 단체의 두목을 잡기 위해서 두목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일본 군인들이 초대형식으로 성에 가두어 두고 일본군 입장에서 스파이를 색출하려고 한 영화다.


그 영화에서 성에 초대받은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실재 반일 단체 소속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떤 중국 노래를 불렀을 때, 노래 어떤 부분의 높낮이로서 의미가 전달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노래 소리로 들리지만 이미 약속이 되어있는 반일 단체의 사람들은 그 안에서 메시지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두 명 중 한 명은 고문 받다 죽고, 한 명은 병원에 후송되어 가서 자기들만의 노래를 불러 메시지를 전달하여 참사를 막게 된다. 그게 메시지고, 그렇게 메시지가 있는 것은 말씀이고 말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 소리다.


즉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을 일으키시는 목적과 사람의 존재 목적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이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신 들린 사람의 소리와 같이 입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들을 때는 그냥 소리인 것이다. 왜 그것이 소리이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면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냥 연약한 인생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 기도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신앙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지가 없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 즉 복된 소식이고 복된 말씀이 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복음이 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된다고 하는 모든 말은 그냥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누가 들어도 복음이라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교회다. 그러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목사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교회 안에서 돈 있을수록 인정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또 예배시간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만 특송을 할 수 있다? 그럼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냥 소리에 불과한 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신앙이라고 말하는 모든 소리는 다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사슬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는 귀신들린 자의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런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고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것이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벗어나서 위대해지고 강해지는 것을 죄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것과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같은 것이다. 뭐랄까 목적도 모르는 채 신비한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 원인이라면, 그 결과는 귀신들린 자의 모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비한 능력은 없어져야 하는가? 그게 아니다. 정말 진정한 능력과 기적이 뭔지 아는가? 그것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 앞에 기적을 보이시는 이유인 것이다. 신비한 능력 자체가 목적인 신앙은 다 귀신 들린 자와 같은 것이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 역시 다 귀신 들린 자와 같이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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