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5장 13-21절) 우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17. 07:30 Writer : 김홍덕

요한일서의 마지막 말씀은 문맥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좀 난데없이 '우상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고 그 예수님은'참 하나님과 영생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으로는 언뜻 연결이 잘 안되어 보일 수 있다.


우상,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상징 내지 형상 혹은 전도된 신념을 고집하는 것'이라고 위키백과(wikipedia)에 나온다. 간단하지만 아주 훌륭한 정의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리고 아울러서 '우상=편견'이라고 정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관점으로 우상을 본다면 이는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혼돈과 편견을 가진 편향된 신앙 아니 고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데 어떤 형상을 두고 그것이 하나님이라 생각하면 그 형상이 바로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번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이 왜곡되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있어야 할 것이 없음에도 있어야 할 것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거나, 하나님의 의와 뜻이 없는 것임에도 하나님을 믿는 일로 고집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와 가까운 의미의 이 시대적 표현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영웅은 사람이 처한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때로 '나의 우상'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와 우상은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우상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우상이나 영웅은 모든 사람이 그것에 이를 수 없다는 절대적인 정체성이 있다. 모든 사람이 슈퍼맨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상이 우상인 것은 본질은 망각하고 어떤 형상이나 이념이나 생각 속 인물과 같은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는 대상은 전부 우상인 것이다.


돈이 우상이라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인생의 곤고한 문제들을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이 우상일 때도 있다. 즉 그 사람과 같이 되면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본질적인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형이하학적이고 재화와 용역에 관한 문제들을 기대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관한 것에 대한 영웅이나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 기대하는 모든 기대의 대상과 희망을 이루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모든 이념이나 형상은 다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은 한 마디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아닌데 신앙의 대상이나 근원으로 여김을 받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없이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내는 삶의 모습을 잘 지켜 행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우상이다. 즉 성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경말씀을 우상취급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금송아지 안에 하나님의 뜻과 의가 없고, 또 금송아지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하나님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향기를 낼 수 없는 꽃 그림 같은 것이다. 즉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가 어떤 삶과 어떤 표현을 하는 것인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기록한 것임에도 그런 삶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의, 곧 사람이 지어진 목적은 외면하체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성경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흡혈귀가 나타나면 십자가를 들인 댄다는 식의 개념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본질이 흡혈귀를 내어 쫓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인데 그 정체성은 제외하고 모양 자체가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하나가 없는 상태인데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섬기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이다. 내용이 없는 형식을 내용의 본질로 섬기는 돌이나 나무를 조각한 것을 하나님이라 섬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형상은 없이 본질만 고집하는 생각 속에 있는 이상과 같은 것 역시 다 우상인 것이다. 형상 없는 이상을 우리는 허상이나 허영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내용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형식만 섬기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상 취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1,2,3 계명이 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다 뜻이 있는데 그 뜻은 외면하고 만드신 것 자체를 하나님과 같이 섬기는 것은 전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기록한 목적 즉 행간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문구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뿐 아니라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을 벗어버린 존재인 천사를 그리스도와 같이 신앙하고 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무시한 체 하나님의 아들은 몸이 없는 존재라 믿는 그 생각도 우상인 것이다. 


요한 사도는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이 우상을 멀리하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난 삶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난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삶이다. 그 결정체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로고스)이 육신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기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께로 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나타내는 이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고 형상화하거나 전도된 신념을 고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기에 요한 사도는 이것을 멀리하라고, 그것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기록한 사도바울과 요한사도는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말씀을 전했다. 사도바울은 율법을 형식으로 지키는 것과 조각된 어떤 형상을 섬기는 형식주의에 대하여 많은 경계의 말씀을 전했고, 요한사도는 그와는 좀 다르게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전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모두 우상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사도는 초대교회 당시에 큰 이단적인 문제였던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이 요한일서라는 서신으로 전했다. 이는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실재로 예수님을 봤던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


즉 실재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는데 얼마 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사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럴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다.


반면에 바울사도는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적은 지역을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혹은 자신들의 신이라 여기는 형상과 형식을 깨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내용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와 같은 말씀을 많이 한 것이다.


반면에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들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그리스도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요한사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많은 곳에서 말씀을 전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 관점과 또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서신중의 하나가 바로 요한일서이다. 이 요한일서는 단순히 영지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목적 같지만 기록된 말씀은 성경, 아니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본질적인 말씀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신앙들의 모습 중에는 세상적인 것을 교회와 결합하여 교회를 시스템화하고 자본주의화 하는 형식에 치중된 신앙적 편향이라는 우상도 크고,


또 반면에 신앙의 순수성과 순도를 지켜야 한다며 세상을 무시하고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점을 간과하여 육신의 한계와 본성을 제어하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며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적 형태를 보이는 신앙도 많다.


전자를 타락해가는 교회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면, 후자는 광신적 신앙이라 느껴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후자의 경우들은 쉽게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의 순도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시고, 또 한 없이 타락했다 여겨지는 이 세상 속에 살게 하신 이유를 버리면 쉽게 광신도와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까지 요한일서가 우리에게 읽혀지는 이유이고, 필자가 다른 성경에 앞서 요한일서를 포스팅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은 버리고 크고 화려한 교회의 형식으로 승부하는 타락은 이미 교과서가 된 지경이고 눈에 띠게 드러난 것이라 경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세상과 단절하고 세상을 무시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이라 생각하는 신앙의 풍조는 경계하기 어렵다.


그것은 요한사도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동일한 것 같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영지주의적인 관점과 신앙관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혼합된 모습으로 있는지 말로하기 힘들다. 이 요한일서에 대한 블로그의 글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표현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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