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다시 볼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때가 많은데, 엘리바스의 말에 대한 욥의 변론에서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6장 14장 전후의 말로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문제를 떠나서 친구가 환난 중에 있으면 돕고 위로하는 것이 우선인데, (욥의 입장에서 보면) 다짜고짜 ‘너의 형편을 보니 분명히 하나님께 범죄 한 것 같으니 회개부터 해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 반문하는 부분입니다.


욥의 이 말은 사실 우리 일상 가까이에 많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있는데 말로서 배부르게 하라, 평안하게 하라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말씀하기도 했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사람들은 자기 신앙 안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귀한 것이니 배고프고 욥과 같이 고난당하는 사람에게 ‘교회에 가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가장 큰 것을 주는 것이라 말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그것입니다.


욥의 상황만 보더라도 욥이 졸지에 자식과 재산을 잃고 몸마저 병들었는데, 설사 그것이 하나님의 징벌로 인함이라 하더라도 ‘누울 자리는 있냐?’ 라고 묻고, 약이라도 발라주는 것이 먼저이지, 그 꼴을 보고서 하는 말이 “네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서 이 꼴이 되었으니 회개해라!”라고 하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말인지 의아한 상황이긴 합니다.


이러한 문제를 조금 더 확대해 보면, 결국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가치 부여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가치 있는 일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 최고의 가치이고, 그 가치를 가졌다는 점에서 자신들이 최고의 가치를 가진 존재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로 대속하시고 자신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아들로서, 창조주의 아들과 그 의를 가진 존재로서 자신의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가진 자로서 베풀 듯이, 나누어 주듯이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고 기부합니다. 그리고 그 가치를 가지고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자신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또 행위로 범죄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삶이 환난을 당하고 있지 않은데, 그와 다르게 육신의 형편이 곤고해진 사람들을 보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 아니면 ‘하나님께 범죄 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가치관이고, 욥의 세 친구들의 모습이고, 근원적으로 보면 사탄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가치는 거듭났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거듭났을 때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신이나 자기 옳음을 좇아 구하고 신앙하는 것을 단지 하나님께 구한다고 거듭났다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믿지 않는 것 보다 못합니다. 사람이 뭔가 바뀌려면 잘못되었다는 것부터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에 다닌다고 거듭난 것이라 할 수 없고, 세례를 받고 교리 문답을 했다고 거듭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문답이나 면죄부나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무상이나 유상이나 다 계약이듯, 교리로 정해서 죄를 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그것이 돈을 냈던 무상이든 다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전 면죄부는 일시불이고 지금의 신앙인들은 단지 할부로 내는 차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하나님을 믿는 최고의 가치가 바로 그 가치를 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고귀한 권세를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뭔지도 모르는 자들이 정의한 기준에 따라 인생 최고의 악인이 달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하나님을 믿는 가치의 본질입니다. 


정말로 이 가치를 안다면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다른 사람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형편을 보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거나 아니면 좋은 신앙이라고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보다 낮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하는 섬김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세 친구들이 욥에게 보인 태도는 전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욥의 형편을 보고서 자기 경험으로 볼 때 이런 꼴을 당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욥의 처지를 염려하고 돌보는 것보다 앞세우는 가치관은 전혀 십자가와 무관하고 하나님의 마음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기에 나누어주고 베풀 듯이 행위로 선행을 쌓으려는 것은 거듭난 것조차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조차 도둑질입니다. 자기 것 아닌 것을 자기 것처럼 행사하는 것이 도둑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한 사람입니다. 이는 베푸는 것이라기보다 섬기는 것이며, 종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상대를 가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섬기고 순종하신 것은 제사장과 빌라도였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멀리하고, 교회의 가는 것과 생각이 다르다고 배척하며,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그렇지 않은 사람과 거리를 두고 등지는 것이 더 좋은 신앙이라고 말하는 시대입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할 수 있는 형편의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잘 못 믿어서’, 아니면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처럼.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믿는 것도 신앙도 아닙니다. 거듭남? 근처에도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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