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오고, 심판이 있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재림을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또 믿는다.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대부분은 하늘에서 구름이 땅에 내려오듯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생각한다. 아니 그것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오시겠다고 하셨으니 오실 것이다. 모두의 상상과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형상으로 오실 것이다. 내용이 있으면 형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다만 우리는 그 때와 시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시와 때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있고, 그 의가 형식을 가진 것으로 나타나는 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또 세상으로 표현된 것과 같이 우리 심령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의가 또한 형식으로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체험하여야만 종말을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는 것이면 상당히 곤란하다. 우선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기 있는 자들 중’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볼 자도 있다고 하신 것이 문제가 되고, 또 하나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이들이 수 없이 많은데 그것을 살아생전에 보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 답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형식으로 표현되는 법을 알면 해결이 된다. 예수님의 재림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이다. 오래 전 승천하신 예수님의 영이 다시 오늘날 자기 심령에 임하시는 것이 재림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재림이 체휼된 사람들이어야 실제로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간혹 사람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다고 한다. 보여주면 믿겠다고 한다. 그러나 전 세계의 실황을 생중계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만약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시고 그것을 방송으로 중계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다 하나님을 믿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뉴스들도 다 믿지  않는데 그럴 리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자기 안에 있는 의와 가치관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보기 때문에 자기 안에 있는 의와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은 것은 봐도 믿지 않고 음모론이나 조작설로 치부하고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못 박힌 손과 발을 가지고 이 땅에 재림하시고 그 모습을 방송으로 생중계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자기 안에 예수님의 심령이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믿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과 본성이 자신의 의와 가치관과 본성이 되지 않는다면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가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 그것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요, 삶의 목적이요 의미라는 것을 알고 순종하며 받은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가시면 오시겠다고 한 성령이 자기 심령에 오셔서 그렇게 순종한 십자가의 이미지가 생명이 되게 잉태케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시 오신다고 하신 재림인 것이다. 


그 재림이 자기 안에 없으며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시든, 우주선을 타고 오시든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다른 의에 기준을 가지고 있으니 그렇게 예수님이 오셔봤자 옛날 유대인들처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시는 이와 같은 의가 자기 안에 없으면 어떤 이가 와도 오시는 이를 오신 그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자기 심령 안에 오시는 재림이 없다면 세상이 천지개벽을 해도 자신이 가진 의를 주장하는 것이 바뀌지 않을 것이고, 지금과 같이 사람들이 모두들 자기가 옳다는 것을 여전히 주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의가 또 충돌하고, 그 의를 좇아서 피라미드 위로 올라가려고 애쓸 것이기에 지구가 몇 번을 바뀌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본성이 된 사람은 그 의가 하나님의 의와 같아서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그 아들의 본성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볼 것이니, 이전과 다르게 세상이 보일 수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사는 동안의 그 세상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새롭게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구가, 우주가, 세상이 천 번을 바뀌든 만 번을 바뀌든 언제나 그 세상이고 그 하늘이고 그 땅일 뿐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다. 이사야 43장에도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베드로후서에도 또 우리가 늘 궁금해 하는 요한계시록에도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말씀이 있다. 그런데 그 말씀들 어디에도 새 하늘과 새 땅을 그 시점에 창조하신다는 것은 없다. ‘나타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것이다.’, ‘바라 볼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이다.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지,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시 만들 것이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처음부터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새로운 것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지, 생명이 있는지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의 해답은 ‘신의 성품’에 있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안목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생명이 새롭게 되면 하늘과 땅이 새롭게 보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이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면 절대로 세상이 새롭게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새롭다면 고쳐달라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자신의 생명이 새롭게 되면 되는 것이다. 그 생명을 가지고 있으면 어떤 세상이라도 새롭게 되는 것이다. 입사하는 회사나 직장은 어제도 있었지만 새롭게 입사한 사람은 가족들에게,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새 직장’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듯 자기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다면, 신의 성품이 있고,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있어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자기 안에서 풀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세상이 와도, 어떤 하늘을 만나도, 또 어떤 날을 만나도 언제나 새롭고, 날마다 새로운 것이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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