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를 마치며…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17. 09:42 Writer : 김홍덕

미가는 잠깐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과 같이 자주 회자되거나 언급되는 성경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미가를 포스팅하고 싶게 만들었던 것은 ‘사마리아’라는 단어였습니다. 사마리아라는 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야곱의 수치라고 비유하신 말씀 때문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로 본다면 야곱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일 것이고, 그들에게 사마리아와 같은 수치가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세상과 간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세습을 하며, 말로는 경건한 척 하지만 굵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도, 비판을 받는 기독교나 그것을 비난하는 기독교 안팎의 가치관도 알고 보면 사실은 같은 세계입니다. 언행일치라는 측면에서 본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행위>가 그 뿌리인 것은 같기 때문입니다.


각종 비리를 일으키는 교회와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교회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결국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거룩함과 그 거룩함 때문에 화려해지는 교회에 맞는 행위 규범을 보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본질적인 것은 교회가 사회봉사를 하고, 청렴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같은 세계에서 누가 더 잘하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지금으로 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책망하시는 것은 도덕적 타락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성적 타락과 부정한 저울과 같은 책망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책망이기에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심령을 가졌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와 생각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에 대한 책망은 단지 행위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봐도 교회를 필요 이상으로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는 것은 크고 화려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크고 화려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치관이라면 예수님은 하늘에서 황금마차를 타고 내려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나셨는데, 그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면서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교인 많은 교회의 목사나 장로가 노회나 총회에서 큰 소리 낼 수 있는 것은 성경을 바로 보는 사람들의 행사가 아닙니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한 탓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 곧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큰 수치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은 전부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면서 먹음직하고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 생각한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았더니 네피림이란 위대함이 나왔다는 것은 물론이고, 구약성경의 많은 선지자들이 경고한 타락 모두가 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 곧 간음한 것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다음에 시험을 받으신 것도 그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위대한 일들,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으며,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유혹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는 교회는 이 시험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크고 유명한 교회, 많은 공부와 신학을 했다는 유명한 목사일수록 더 쉽고 깊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란 것을 덥석 잡고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신앙적 요소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기도해서 병자를 낫게 한다거나, 신학을 했다거나, 성경을 많이 봤다는 것과 같은 신앙적 공로나 능력도 잘하면 잘 할수록 더 좋은 신앙이라고 하고 있는 것 역시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타락의 모습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보여준 모습이고, 예수님이 왕이 되면 좌우에 자기 아들을 앉혀주기를 청원하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런 죄악 속에 있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잘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은 능력도 말씀도 다 버리고 얼마 되지 않는 옷가지마저 다 벗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므로 우리의 모습 보여주고자 하신 예수님을 믿노라 말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에 대한 더 이상의 모독이 없는 것임에도 경쟁적으로 그것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은 오늘까지 미가 선지자의 말씀이 성경에 있어 우리가 읽어야 하는 이유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타락이라는 것을 늘 행실의 부정함에 둡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존재는 어디까지나 마음에 있는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존재입니다. 즉 행위는 그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생각과 뜻이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생각과 뜻은 무엇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 의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책망은 행실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는 의와 뜻과 생각을 보시는 것입니다. 행실은 어디까지나 종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책망은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무엇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것인지에 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완전한 지혜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라고 한 것은 여호와가 사람이 그 마음에 가져야 하는 의로움의 기준이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 아들이 이 땅에 올 때 말구유로 보내시고, 하늘로 들려 올리실 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그 의가 자기 안에 모든 행실을 결정하는 의로움으로 순종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의 의가 되고, 말구유에서 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사람의 정체성을 자기 운명과 삶의 목적과 의미로 순종하는 그 하나만이 하나님의 앞에 의로운 것이고, 반대로 그 하나가 없어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하는 모든 것을 인하여 늘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세상에서 위대하고 좋은 것을 좇는 것에 종과 같이 매여 있으므로 그것을 추구하고, 그 추구한 결과와 성과와 공로를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사람의 타락의 정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야곱의 수치라고 말씀하신 세상과의 간음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 역시 이 부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여기며 가르치고 교회를 크게 건축하고 유명 인사나 많은 사람이 다니는 교회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오늘날도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미가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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