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보이신 것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나 예수님의 그 신분이나 행위가 도저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용납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보일 수 없는 능력과 말씀을 하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에 죽이려고 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 되어 그 육신으로 그 본성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볼 때는 용납할 수 없고 조롱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보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보이셨고, 선지자들은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신 분이시기에.


미가 선지자는 온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자들이 “너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조롱한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내려오라!”고 외친 것과 같고,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에도 역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는 것에서 결국 사탄이나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의 삶을 조롱하는 것은 같은 것임까지도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 곧 행위로 하나님을 믿기에 더 좋은 공로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세상의 좋은 것과 간음한 사람들이 가진, 위로 가야 더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그 신앙으로 보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조롱거리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도 만연한 신앙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 누가 되었던 반드시 “그럼 예수님만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냐?”는 식의 반문을 하는 이가 꼭 나타나는 것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그에 걸맞은 행동이 수반되어야 좋은 신앙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나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모든 신앙의 암묵적이고 가장 큰 계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사람의 행위를 판단합니다. 그 행위는 단지 도덕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적인 예식과 규례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교단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추태가 유전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을 모르기에 행위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과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온전한 존재라고 말하면 다들 “그 신앙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미가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성을 쌓고 지경을 넓히듯 그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 못해 넘쳐나고, 교회와 성당 절이나 또 세상 사람마저 이단이라 여기는 각종 신앙의 공통분모로서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가져가야 한다하기에 그 지경은 참으로 넓은 것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가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미가 선지자가 아주 결정적인 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황무해진다는 것의 주어이자 주체는 땅이고 그것은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인생들이 황무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나이 들고 살만큼 산 다음에 인생의 허무를 느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벽만 보고 도를 닦던 유명하다는 한 중이 죽으면서 “인생은 무(無)다.”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죽었더니 모두들 대단하며 난리 법석을 떤 적이 있었는데, 그 말대로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뭐한다고 밥도 먹지 않고 벽보고 도를 닦았을까? 싶기도 한데 그런 생각조차 못하는 것은 모두의 인생들이 그와 같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비단 불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숨을 거두어가는 부모 앞에서 “예수님 꼭 붙잡으세요.”라고 외는 것에서 보듯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평생 기대했던 천국에 대하여 희미해지고 기도하고 성경 읽는 것과 같은 행위의 열매가 늘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에 뭐라도 더 해보려 몸부림치는 것은 정말로 황무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죽을 때가 다 되었는데도 아직도 자기 신앙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평생의 수고를 독촉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황무하고 허무한 것입니다. 이것의 이면에서는 신앙이 온전함에서 시작하고 그 온전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면서 이루어내어야 한다는 버리지 못하는 신앙의 무지함이 있습니다. 그 무지함과 어두움이 평생을 행위로 만회하는 수고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롱하던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섬기는 신앙, 예수만 믿어서 되겠냐고 조롱하던 신앙은 하나님의 의가 그 심령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있으므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표현하면서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의 행위라도 더 이루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을 누리고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무엇을 더 이루려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행위에 주목하지 않습니다. 행위는 존재의 본성만 온전하면 나타나는 불가분의 것인데 왜 그것을 챙기려 하겠습니까? 그것이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반문하며 조롱했지만 정작 하나님은 그들이 조롱하는 그 사람들 자체였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그렇게 가까이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있었다는 것도 모른 체 인생을 마감하는 황무함만 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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