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7:1-6) 사람들 속의 재앙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11. 6. 07:28 Writer : 김홍덕

미가서는 성경 안에서도 몇몇 구절을 제외하면 그리 유명한 성경에 속하는 책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나마 좀 아는 것은 우리가 여호와 앞에 무엇을 가지고 나갈 것인지를 언급한 것과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날 것이라는 말씀 정도가 그나마 좀 익숙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성경 안에서 비중이 작다고 그 말씀의 뜻이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사람과 일이 다양하듯이 성경 안에서도 다양한 시각과 사건과 말씀으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권선징악>이라는 주제 하나를 가지고 다양한 소설이 나오는 것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 미가 선지자의 말씀은 사마리아가 야곱의 수치라고 시작해서 베들레헴에서 나는 아기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될 것이며, 그런 회복을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가지고 나갈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와중에 하나님께 가지고 가는 것은 일 년 된 수송아지나 천천의 수양의 기름으로 대변되는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낸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악당을 이기는 영웅의 능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곧 세상의 것을 신앙에 결합하여 하나님 앞에 간음한 자와 같이 된 신앙에서 벗어나는 것은 한 아기가 나듯 존재로서 시작하는 것임을 알고, 존재의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 지혜가 바로 사마리아와 같은 수치를 이겨내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위대하고 높고 좋은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하나님을 믿어서 이루어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일로 말한다면 교회가 크고 아름다우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거나 세상에서 훌륭한 지위에 오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을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여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과 간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치관 혹은 신앙관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 갈 때 송아지와 양을 가지고 가듯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을 신앙으로 이루어내었다고 여기는 것을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그것을 이루어내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그 과정을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바랍니다. 이 모순과 죄악의 악순환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흔히 이야기하는 모든 악함이 바로 그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이라는 것은 항상 상대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더 좋은 것을 가지려면 누군가는 나보다 나쁜 것을 배당 받아야 하는 이치 속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법이 우리가 세상에서 부정하다 여기는 불법과 불평등을 낳는 모체인 것입니다.


하나의 예로 세상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람, 낮아지려는 사람, 성공에 관심이 없는 사람으로 인하여 시끄러워지거나 문제가 되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뭔가 고쳐야할 것이 있는 것과 같이 생각되고, 그래서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모든 뿌리는 바로 ‘이것이 옳다.’, ‘이래야 한다.’며 외치는 사람들과 그 주장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7장에서 앞부분에 언급하고 있는 재앙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으로 인한 것입니다. 미가서의 앞부분과 이어보면 결국은 하나님께 어떤 행위의 공로를 가져가려는 생각 중에, 그 가지고 가려는 것이 무엇이 좋은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다보니 세상에서 좋다 여기는 것을 가지고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가지고 가기 위해서 세상에서 더 높은 곳으로 가려고 하니 여러 가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크게 분노하는 부정은 바로 <반칙>입니다. 공정하지 않게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을 지키지 않고 어떤 유익을 수취하는 것이 바로 모든 부정과 비리와 악함과 사람을 분노케 하는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부정 중에 가장 으뜸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논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세상의 성공을 영광으로 여기는 가치관 위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리려는 그 마음 자체가 이미 반칙인 것입니다. 쉬운 말로 애들 싸움에 어른을 불러온 아이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부정은 하나님은 그런 일을 도우시는 분이 아님에도 그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식칼이 흉기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 어떤 능력을 기대하시거나 기적을 지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에게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와 삶의 목적을 알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단지’라는 한정하는 말로 사용했다고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행위와 능력은 그 존재의 정체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자가 맹수인 것은 그 유전자, 곧 존재 정체성을 인함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또 이웃이, 품에 누운 여인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 정체성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믿지 못함에 있어 아들이라는 존재 정체성을 믿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요즘은 과학적인 증명까지 가능합니다. 그런 관계들이 서로 믿지 못하고 대적하는 관계가 되는 것은 존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은 행위에 관한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미가 선지자가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또 품에 누운 여인이나 이웃을 믿지 못하는 것을 재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어떠함을 인하여 서로 대적하는 사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는 다름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성공과 그 공로와 성과를 하나님께 가져가기 위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존재로서 대하여야, 아니 그렇게 하기만 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사람들이 행위로서 서로를 평가하니 믿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것이 재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 곧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고, 행위의 소산인 육신으로 성경을 얼마나 지켜내고 또 그 성과로 세상에서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려는 관점으로 하나님을 존재로서 아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완전한ㄴ 지혜를 가진 존재를 보면 조롱하고 욕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 집약된 결과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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