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를 지고) 설탕과 소금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8. 7. 2. 22:52 Writer : 김홍덕

젊은 부부가 삶은 감자를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맞는지,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맞는지를 다투다가 다툼이 커져서 결국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사건이 실재 사건이라고 하니 나도 그런가 보다 생각하다. 물론 많은 글이나 대화 속에서 인용한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기에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나?’고 조롱하듯 반문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자를 찍어 먹는 것은 설탕이냐 소금이냐 다툰 사람들과 똑 같은 행동을 매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그것을 다들 알고 있다면 그곳은 분명히 천국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웃기는 사건은 성경이 말하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나타낸다. 선악과라는 것은 결국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이다. 한 사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기준은 바로 자신의 의로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에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주장에 나를 맡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세상에서 더 이상의 의로움이나 선함이 없는데, 오히려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로 믿는 유대인들이 가진(먹은) 선악의 기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옳지 않은 의로움이지만 <너>가 주장하는 의에 몸을 맡긴 것이 십자가인 것이다.


삶은 감자를 어릴 적부터 설탕에 찍어 먹었던 사람에게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수용하려면 육신이 괴로울 것이다. 입에 맞지도 않고, 먹은 것 같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입에 맞지 않는 소금에 찍은 감자를 먹는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지 않는 것을 자기 육신으로 수용할 본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 부부가 기독교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확률적으로 20% 이상의 확률을 가지고 있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다. 오늘 하루를 돌아볼 때 누군가와 다투었고, 어떤 일에 짜증나고 화를 내었던 것이 있다면 그 사건을 생각해보자. 다투고 짜증나고 화를 내었던 이유가 ‘내 맘대로 되지 않았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아마 100% 그랬을 것이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것은 십자가를 버린 모습이다. 십자가는 남의 의에 나를 맡기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내 육신을 수고로움에 내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투었던 것, 짜증 냈던 것, 그 일에서 내가 육신으로 한 번 더 수고하기만 했다면 아마 그럴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그러므로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이 옳은지, 설탕에 찍어 먹는 것이 옳은지를 다투다가 이혼한 사람들이 별난 것이 아니다. 오늘을 살면서 내 몸을 상대가 옳다는 것대로 한 번 더 수고하기 싫어서 다투고 짜증내고 화내고 있다면 그 이혼한 부부와 같은 사람이다. 선악과는 먹었고, 십자가는 버려 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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