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여러 각도에서 함축된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와 같은.(물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종교의 범주로 격하 시킬 수는 없지만.) 그 하나의 표현을 하자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육신을 가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인식할 것이냐의 문제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기에 이 인생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심을 믿겠다는 것은 이 인생의 모든 의미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육신으로 사는 인생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성경이 시작되면서부터 제기된 문제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도 이 육신으로 사는 삶이 하나님이 주신 삶이라고 인식하면서부터 자기 삶이 하나님의 세계로 열리는 것이고, 많은 이들이 각양의 의견을 내어 놓는 선악과도 이 육신을 어떤 관점으로 볼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육신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기에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세계인 사람에게 인생은 감사한 것이기에 만족의 동산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이며, 육신으로 에덴동산에서 산 사람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신에 대한 관점은 예수님이 오셔서 아주 명확하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데 천사와 같이 신비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들과 같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에서부터 그 의미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육신을 드리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심으로써 우리의 육신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인생을 사는 이유와 의미를 보이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은 우리가 육신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신이 더 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르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고 이를 위하여 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육신은 보존하고 평안해져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소비하면 할수록 복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육신은 명확하게 <소비재>입니다. 단 한 번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이 모든 것을 설명합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죽어서 천국’이라는 연장선을 그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장선입니다. 즉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산 삶의 모습과 의미 그대로 죽어서 천국이든 지옥이든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곤고한 중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평안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고난이라 여기기에 죽어서도 곤고한 삶이 될 것이고, 이 땅에서의 삶이 육신이 소비되고 연약해질수록 영광스럽고 감사하게 여기며 산 사람은 역시 고난이 없는 천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소비재라면 그것은 어떤 목적 하에서 소비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의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그래서 굽이 갈라진 짐승을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소비되는 것임에 순종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이 평안해질수록 하나님께서 혹은 자기가 믿는 신이 복을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나, 육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육신을 소비(정확히는 허비)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1서)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두 육신이 기준이 되어 육신을 허비하는 것을 이야기하심입니다. 육신이 평안을 바라니 내일 육신이 평안해지기 위하여 오늘 수고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수고하니 이 인생이 곤고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일의 평안을 위하여 아니면 내일 벌을 받지 않기 위하여 오늘 육신의 본능을 제어하면서 성경이 말하는 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모든 것이 이 세계인 것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지키는 모든 것이 바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고 율법신앙인 것입니다. 바로 흔히들 이야기하는 구약시대의 신앙인 것입니다. 지키려는 말씀이 신약이냐 구약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관이 구약이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시고, 내일 일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이 삶이 하나님의 의도 아래서 창조된 것이라는 것을 온전히 믿는 사람은 이 삶이 깃든 육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소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육신을 소비재로 여기자니 인생을 하찮게 보는 것 같지만 그 소비가 전능하신 하나님과 하나 되는 소비라면 그 보다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고귀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어느 날 자기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소비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날이 바로 하나님의 태초가 열리는 날이 되는 것이고,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의, 우리 육신을 소비하는 목적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가진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더 이상 의로울 수 없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인생들이 각자 육신의 정욕을 좇아 자기 옳은 대로 판단하고 행하는 선악과를 먹고서 자기가 조성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주신 자기 삶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이 주관하며 사는 자들의 주장에 끌려가서 그들의 주장대로 육신을 드리는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육신을 가진 이유이자 목적이자 의미인 것이며, 소비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 삶은 육신을 소비하는 것이기에 육신의 수고를 곤고함과 고난으로 여기는 인생들의 관점에서 보면 고난인데, 그 고난을 받을 이유를 살피자면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매 맞는 것 같으니 애매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애매한 고난을 베드로가 볼 때 그러지 않아도, 아니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은 예수님의 끌려가심과 같아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서 사는 모습일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양을 치는 것을 본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길거리에서 예수 믿으라고 외치다 받는 조롱이나, 지친 몸을 이끌고 안 가면 벌을 받을 것 같아서, 아들 사업이 안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새벽 기도회를 가는 곤고함이나, 주일 지킨답시고 회사 동료들 일할 때 교회에 가므로 당하는 불이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는 삶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수고하는 것에 소비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곤고한 것이기에 고난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육신을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진정한 영광이고, 감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인생은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그 자체로서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것인 것입니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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