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개봉했던 <어밴저스 인피니트 워>라는 영화에는 타노스라는 악당이 나오는데, 그 악당의 주장은 온 우주에 인구가 너무 많아 식량문제가 심각하니 무작위로 우주 인구의 반을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손가락만 튕겨도 우주의 반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고 6개의 인피니트 스톤이라는 것을 모으고 실행에 옮깁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정말로 어이없는 모순이 있습니다. 우주의 반을 손가락만 튕겨서 죽일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 능력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잠깐 서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어이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에도 이런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고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시며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바로 잡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해프닝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에도 동일하게 녹아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마지막 부분인 10절에서 고난을 잠깐 받으면(견디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고 견고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고난에 대하여 이 세상 살 동안 고난을 잘 견디면 하나님께서 그 보상으로 천국의 복락을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 상식적인 개념이 되어서 누구 하나 그것을 의심해 보지 않지만, 이것은 앞서 이야기 한 역설적인 면과 궤를 같이 합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육신에 각종 욕망을 주시고, 또 자기 생각을 다 구현할 수 없는 연약한 육신을 주신 다음에 그 욕망을 어떻게 이겨내는지, 또 연약한 육신을 어떻게 강하게 단련하고 수련을 하는지를 평가하신 다음에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이 땅에서도 주시고 더 나아가서 죽은 다음에 그 수고의 등급을 기준으로 크게는 고래 등과 같은 기와집을 상급으로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힘든 과정을 겪을 때에 하나님께 얼마나 의지하는지를 보시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지에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시는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면 도와주신다는 것을 앞서 이야기한 욕망의 억제와 연약함의 극복을 도우시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로스의 모순과 같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욕망을 다스려야 온전해지고, 연약함을 기도와 수련으로 더 강해지고 온전해지며, 성경도 지식적으로 공부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처음 만들 때 불량품이거나 완성되지 않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재공품 상태로 태어나게 해서 살면서 완성품이 되어야 온전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며,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이 뭐가 좋았는지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를 정말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본다면 하나님은 쥐를 잡아 놓고 죽이지 않고 가지고 놀고 있는 고양이와 같은 분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이라는 것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극복하기 힘든 인생살이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보시고 그 이겨내는 행위와 공로를 기준으로 그 인생의 믿음을 평가하시고 또 죽어서까지 상과 벌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겪는 삶을 잠깐의 고난으로 보고서 이생에서의 고난을 잘 이기면 하나님께서 영원히 영광된 삶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을 넘어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인지 놀랄 정도의 어두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가치관은 결국 <행위로 의로워지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런 고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각종 시험을 주신다거나, 인생으로서 성경대로 삶을 살기에 힘든 조건들, 육신 안에 있는 욕망이나 연약함과 같은 조건들로 인하여 곤고한 삶을 살게 하고 그것을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여 극복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이겨내고 영광을 얻으려면 행위의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고난을 이겨내서 얻는 것이 육신의 평안이나 세상에서의 성취라면 그것은 고난을 이겨내는 것은 투자일 뿐 믿음은 아닌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난에 대하여 성경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도나 금욕적인 수련이나 또 손해를 억지로 감수하거나 신념으로 견디는 행위로 이겨내거나 맞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욕망을 극복하고 자기 이익을 구하는 유혹을 이겨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 인생의 정체성을 아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이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수고하고 섬기는 것을 위하여 주심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 순종은 세상이 추구하는 위로 올라가셔 의로운 것과 반대이며, 몸이 평안할수록 복을 받았다는 가치관과는 반대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도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고, 또 고난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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