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이나 세상의 마지막은 뭐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종말론적인 느낌을 줍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절망적인 것이고, 그 앞에서 무언가 마무리를 잘 해야 하는 것을 우리는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마지막’은 우리에게 늘 가까이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어떤 것이 그 존재의 목적을 다 할 때, 혹은 기대를 다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마지막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은 단지 시간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간에 대한 개념은 크로노스적인 시간, 객관적이고 표준화 된 시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카이로스적인 시간, 주관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12시가 점심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크로노스적인 시간 개념이라면, 배고플 때가 밥 먹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카이로스적인 시간 개념입니다. 마지막도 서기 2500년 어느 때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존재 목적이 상실된 때입니다.


성경이 시간적인 개념을 표준시와 같이 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천지창조 때에 하나님께서 첫째 날을 만드시고 그때를 ‘서기 원년이라 하시니라.’와 같은 제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하나 사건 때 마다 ‘때는 00년’이라고 언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때가 몇 년인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의인 5명이 없다는 것이 멸망의 때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그것입니다.


만물에게는 마지막이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고, 그 목적이 소진되는 것이 바로 그 존재의 마지막인 것입니다. 휴지의 마지막은 오물을 닦아 내었을 때고, 그릇의 마지막은 담은 것이 새거나 간직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바로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먼저 존재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있기에 그것이 소진되는 마지막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씀하시는 마지막은 어디까지나 목적의 존재 유무에 관한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의 마지막도 달력의 시간으로 어떤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다 수행한 그 때가 마지막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것을 ‘달려갈 길은 다 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죽었다는 것은 그 목적 안에도 들지 못한 쓰레기와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생들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든 모든 것에 존재의 목적이 있음을 알뿐 아니라 그 목적을 인하여 만들고 사용하고, 그 목적 다하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자신들이 왜 존재하는지는 생각지 않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으니 죽은 것이요, 그런 자들에게 마지막은 그저 달력의 어느 날이란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으니.


베드로 사도가 쓴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성도>들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알고 그것이 자기 삶과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에게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고, 아직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이며, 인생은 일회용이므로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세월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은 세월을 아끼라는 것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사랑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면 늘 이야기하듯, 사랑은 결국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관계입니다. 세상의 반이 남자고 또 다른 반이 여자인데 그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한다는 것은 자신의 연인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이성이라는 뜻인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유일한 내용이요, 의(義)요, 목적이 되시고, 인생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유일한 형식이 되는 관계요, 서로에게 그런 의미가 되는 유일한 관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마지막이 가까우니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인생들이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과 육신 가진 인생이란 것을 알고 그것을 나타내고 표현하며 사는 것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달성될 때, 하나님께서 각 개인에게 계획하시고 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분량의 삶이 마지막이 되고 다할 때까지 서로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알게 하고, 그것을 즐기고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십자가를 지듯 섬기고, 자기 육신으로 서로에게 하나님의 의를 풍성하게 표현하면서 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 것이라고 하신 것도 그것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각자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기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어 서로에게 상대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의미 있는 인생임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도록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인생으로서 존재하는 목적과 삶의 의미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것을 보는 서로에게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미가 있는 존재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죄를 사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인생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아래 있다면 그것은 아직은 마지막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렇게 목적대로 인생을 소비하는 것은 마지막을 행해 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를 알고, 인생이 하나님이 주신 목적 안에서 그 육신을 소비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그 수고를 보는 이들이 다시 하나님 안에서 자기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인생을 소비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때가 두려운 때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소비하여야 하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인생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마지막 때가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산 사람은 마지막 때로 가면 갈수록 즐거운 것이나, 인생을 소비한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하고 허비한 인생들은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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