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그 존재의 실존적 가치의 심판 기준이 됩니다. 시계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는 시간을 제대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가치를 발휘할 수 없다면 외관의 어떠함이나 이런 것은 더불어 가치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특히나 사람이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것이 그러한데 단 두 가지가 그 존재의 목적이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 자신과 자신이 살고 인식하는 세상, 그것입니다.


사람과 세상은 사람의 손에 의하여 만들거나 의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인생을 선택하거나 결정해서 시작한 이가 없고, 세상은 의도하지 않게 시작한 인생이 시작되고 인식되면서부터 인지하게 된 존재고 공간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과 사람의 존재 목적을 자신이 육신으로 살면서 다루는 모든 것과 같이 알려면 사람과 세상에 대한 창조주 혹은 주권을 가진 이를 인정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과학적으로 다루는 진화론이나 생명 연장 이론과 같은 가설 혹은 이론이나 기술들이 가장 큰 허점이 바로 목적입니다. 진화는 생존을 위하여 전개되었다고 한다고 쳐도 왜 생존하려 했는지, 왜 더 나은 생명이 되려 했는지를 알 수 없고, ‘인생은 고(苦) 혹은 무(無)’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육신으로 더 살려고 하는 것도 그 목적이 모호합니다. 요즘 회자되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사람을 지배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에 한 과학자가 답하기를 ‘그렇게 되려면 인공지능이 자아를 인식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아주 훌륭한 답이고, 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좋은 답이기도 합니다. 물론 기술이 발달해서 자아 인식에 가까운 의사 결정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이 생길 수 있지만 그 또한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 의하여 구성된 것이니 인공지능이 투표권을 가진다거나 설교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흉내는 몰라도 가치를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인생이 알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목적을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인간 존재의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시작이 바로 하나님을 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셨다는 것을 단초로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여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러하듯 만들었다면 분명히 목적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무엇을 만들 때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조차 하나님이 그 품성을 가지고 만든 결과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이 땅(사람)이 혼돈하고 어두운 중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시작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자기 믿음으로 순종되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목적이 있는 것이 인식되는 세계가 열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든 천지’가 되고, 빛은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시작이고, 그 시작은 인생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것이니 목적을 상실한 사망의 상태에서의 회복이기에 구원이고, 하나님의 의도된 목적 안에서 살았다는 기준으로 회복되기에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정체성, 곧 이름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그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리스도 신화에 나오듯 신들이 세상의 여자를 취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들이란 그 아버지가 가진 의도가 육신이 된 존재를 말합니다. 존재가 되는 법은 생물학적인 생식이라는 방법이 기본이지만, 우리는 세상에서도 아버지가 가진 의와 업을 잊기 위하여 아버지가 그 가진 뜻을 잘 구현할 사람을 아들(양자)로 삼기도 하듯, 우리 모든 인생도 하나님이 의도하신 의, 곧 사람을 지은 목적을 자기 인생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가 되는 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아들이요 양자며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인생이 가진 육신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것을 보이러 오신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한 것이 또한 그것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곧 내용과 목적이 우리 육신의 삶과 하나가 되는 것, 곧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의와 하나가 되어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며,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모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로 하나님이 뜻하신 의에 있다는 것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은 ‘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순종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면 사람도 세상도 온전하다고 믿을 것입니다. 


단지 사람은 그 하나님의 경영 아래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 뿐. 그 순종을 위하여 육신이 있는 것입니다. 육신을 움직이고 소비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드리기까지 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그렇게 살게 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살았다고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맞는 시계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따라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것은 시계가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인생이 그 창조 목적을 상실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곧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과 같이 인생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사는 것임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생들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이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살면서 알게 된 이는 생명의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자기 육신으로 인지하고서 하나님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살 동안 그런 삶을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자기 육신으로 본 것 중에서 택하여 옳게 여겨 그것을 좇아 사는 육신의 정욕으로 산 자들은 그 육신을 벗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것을 알게 하실 것이니 곧 심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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