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4:1-6) 심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5. 20. 10:40 Writer : 김홍덕

흔히 기독교인들은 세상은 방탕하고 연락에 빠졌기에 세상은 죄악에 빠져서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세상을 삽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에 간 그 시간 동은 일을 하거나 가족을 위해 헌신하거나 심지어 가난한 사람을 돕는 봉사도 하니 그 차이 정도로 더 열심히 살기도 합니다.


다만 사회의 일부인 유흥과 연락의 세계에 대하여 신앙이 허락지 않으므로 그 문턱을 넘지 못하도록 그 세계는 곧 지옥의 관문이라는 문지기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목사들에게 노래방을 가면 죄인지, 술 마시면 죄인지 묻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술 마시는 세계 노래방 아니 주점을 넘어서는 것이 죄인지 묻는 다는 것은 종교가 그 문턱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가 가진 도덕성은 사실 그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연락과 방탕의 세계라고 주장하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구분하는 큰 경계가 바로 사회에서 흔히 ‘밤 문화’라고 하는 세계에 대한 유혹을 이기고 있는 자신들의 모습과 같은 것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세상을 열심히 사는 것에 있어서는 교회에 빠져서 생계를 멀리하는 방탕이 있다는 것은 외면하고 감추고서.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그런 세계라고 한정하고 자신들은 그런 삶을 떠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 노력이 바로 신앙생활이며,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사는 동안 복을 주시고 죽어서 천국이 이끄시는 보상으로 돌아온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윤리규범이지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시고 인생을 주신 의와 뜻의 본질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음란은 사람이 그 존재 목적과 다른 것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로 삼은 삶 전부가 음란이고 음행이며, 정욕은 육신이 그 눈에 보이는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여기며 추구하는 모든 것이며, 술 취함은 육신의 제어와 즐거움을 하나님의 의가 아닌 술에 위탁한 것이며, 방탕은 제 일을 하지 않고 세월을 낭비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모든 것이며, 연락은 이유 없이 조작된 즐거움이니 하나님이 주신 삶의 의미로부터 오지 않는 모든 즐거움이며, 돈이나 권력과 같이 하나님이 인생을 주신 의와 뜻이 아닌 것을 사람들이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여 좇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니 이것은 하나님이 가지신 생명의 법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 바로 이방인의 뜻을 좇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윤리적인 기준이나 종교적 기준을 자라 지켜낸다고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의 밤 문화를 즐기지 않는다고 이방인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앞에 죄고, 이런 상태와 마음을 가진 자가 사회가 말하고 세상이 정한 법을 어겨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존재 본질을 떠나서 제 아무리 선한 짓을 해도 그것은 간첩의 선행 같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죽음의 상태에서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하시려고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피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전하신 것은 우리가 윤리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또 종교적 규범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를 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과 십자가 그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은 생각지 않고 단지 윤리적이고 종교적 규범을 잘 지키면 이방인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의와 뜻을 전하셨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까지 보이셨으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든 죽어서든 자신의 삶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의 비교하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 그 자체가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면서 또한 모두를 심판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이라고 하면 사람이 살 동안 하나님이 명한 계명을 얼마나 지켰는지 셈하는 것이 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행위에 대하여 심판하신다고 하신 적도 없고, 오히려 간음하다 잡혀 온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을 포함한 행위로 인하여 심판을 받아서 십자가에 달리신 죄수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서 사람들이 ‘너 그러면 지옥 간다.’는 식으로 행위를 가지고 심판을 논하는 것은 정말로 어이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대세인 듯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을 드려서 인생의 내용 곧 영에 관하여, 이에 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드리시고 그 영이 육신을 떠나시는 십자가의 사건이 모든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셨는지를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전하심은 지금, 시간적으로 예수님 당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인생의 오늘이라는 의미이고, 그 순간 육신의 살고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자나, 죽었다고 하는 자나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그 죽으심으로 전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전하심은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는 존재, 곧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삶의 근원이 된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a christ)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셨는지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정체성으로 이 땅에 오시므로 그 정체성이 모은 인생의 심판이요 기준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정체성을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로 구분이 되는 기준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기에 하나님 앞에서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그 심판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에게는 이 심판이 생명을 얻는 것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사망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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