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가끔 TV나 영화에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망이나 정글 때로 우주를 향해 가는 탐험가와 같은 사람들의 장면을 볼 때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는데 하나님을 믿는 것 역시 그런 일입니다. 세상에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며 외치는 소리가 넘쳐나는데 그 중에 어느 것을 ‘참 하나님’으로 구분하여 ‘나의 하나님’으로 섬길 것인가 하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것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구축된 기반 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냥 큰 교회에 다니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왠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대할 때 마다 “좁은 문으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머리를 지킵니다.


이렇듯 어떤 씨, 어떤 말씀이 참 생명이 있는 것인지를 알고 우리의 마음 밭에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성경에는 이 여정, 인생의 의미를 찾는 여정에 대하여 많은 사건이 있습니다. 그 시작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여정이 어떠했습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그 말씀 하나에 의지하여 떠났습니다. 그 ‘내가 지시할 땅’이 어딘지는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지시할 땅,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았기에 지시할 땅이란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 곧 인생의 운명과 의미인 자리를 말하는 것인데 그 자리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 상태로 순종했기에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땅이 어떤지 알지 못하는 광야나 정글로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여정을 그냥 떠났습니다. 어떤 땅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어떤 지명, 어떤 주소, 어떤 좌표와 같이 눈에 보이고 형식이 분명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데 떠났다는 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육신의 안목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성경으로 보니 별일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세상에 넘쳐나는 ‘이것이 하나님의 의’라는 외침들 속에서 분별해내는 것이 이것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형편이 이 ‘씨 뿌리는 비유‘에도 녹아 있습니다. 무엇이 생명이 있는 씨인지 어떻게 분별하여 알고 우리 마음 밭에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 이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 컴퓨터를 또 스마트폰을 켜서 성경에 대한 의문을 찾다가 여기에 들리신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이 비유는 좋은 밭에 뿌려진 씨가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누구라도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좋은 밭인지를 따지기 보다는 무엇이 좋은 씨인지를 구분하는 것에 신경을 더 씁니다. ‘이것이 복음’이라는 수많은 외침 속에 어느 것이 좋은 씨인지를 알려고 하는데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마음, 그렇게 자신이 나서서 어느 것이 좋은 씨앗인지를 분별하려는 마음이 바로 길과 같은 땅이고, 돌밭이며, 가시밭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좋은 씨를 분별하느라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 못하기도 하고, 돌과 같이 ‘이래야 복음이지’라는 자신 만의 법을 가지고 있기도 하며, 또 ‘어느 것이 복음인가?’를 따지는 염려로 세월을 다 보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도 않고, 자신 만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서 분별하려고 하고, 또 자기 자신이 망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조심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볼 것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런 것이 있었을까요? 그게 아니기에 믿음이고, 그 믿음을 보였기에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기준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씨를 분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 좋은 씨인지가 아니라, 자신 안에 하나님의 주권과 믿는 믿음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하나님, 기드온에게 찾아온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것인가 하는 문제로 수렴됩니다. 이는 누구나에게 어려운 문제이고, 이 포스트에서 배경으로 깔고 있는 좋은 씨를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가 맴도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나의 기준과 나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사람이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의, 자신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기준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선택하고 조성하지도 않은 자기 삶에 대한 애착입니다. 이 두 가지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길에 있는 나그네와 같이 자기 정체성을 정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좋은 밭은 길도 아니고 돌도 없고 가시넝쿨도 없는 밭입니다. 자기 기준도 없고, 자신을 사랑하므로 가진 염려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한 정체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기준으로 조각한 우상이 아닌 온전한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 마음은 당연히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이나 자기 염려가 없는 밭이 좋은 밭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의 정체성과 너무 다릅니다. 돌과 씨가 다른 만큼이나 다릅니다. 밭에는 돌이나 가시가 있든지 아니면 좋은 씨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기준으로 바로 아는 것이 바로 좋은 밭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을 알면 좋은 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준이 가장 완전하게 나타난 존재가 있는데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 바로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밭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은 씨를 받아 들여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돌짝밭이나 기시떨기가 있는 곳에는 씨가 떨어져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마음에 한해서 좋은 열매를 맺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다 알지?”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돌밭에 뿌려진, 가시넝쿨에 떨어진 씨 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 같지만 그것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기준이 아주 엄격합니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에 대한 기준이 아주 엄격합니다. 좋은 신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양이 있고 가난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닐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부자가 되고, 높은 공직에 오르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찮은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모르는 어두움 속에서 의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목사라는 신분과 교회의 규모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시계추처럼 교회에 갔다 오는 자신의 습관과 관습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고, 교회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다 밭에 있는 돌과 가시나무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속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간단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인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부자가 되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하는 사람들의 세계에서 내가 부자가 될 수 있느냐?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내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 넘쳐나는 생수가 나오느냐? 그것이면 됩니다. 이 두 가지만 만족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신학이나 교회 규모나 저명한 사람 같은 똥 같은 기준은 필요 없습니다. 그것이면 됩니다. 아무리 대단해본들 내가 못하는데 무슨 복음입니까? 그것을 이룬 사람에게는 복음이겠지만 나에게는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곳이 좋은 밭입니까? 나와 같은 사람, 세상의 기준에 의하여 승리자가 되어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또 신학을 해서 목사가 되지 않아도, 사람이 날 때 가지지 않은 기준 중에서 하나를 자신의 기준으로 돌로 가지고 있는 사람이나, 그렇게 되지 못해서 행여 못할까 염려하는 가시를 가진 마음이 좋은 밭이겠습니까? 


답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런 기준 없어도 우리 자신이 들을 때에 ‘나도 저것이라면 할 수 있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따라 나서고, 그렇게 나서서 가다보니 자기 안에서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생수가 넘쳐나는 것을 보게 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멸시받아 싫어 버리운 자” 같다고 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과 같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 가치 없어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말로 바꾸면 신학자도 아니요, 목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세상적으로 볼 때 경쟁력도 흠모할 만한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좋은 밭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가 있는 교회, 또 크게 지어지고 수천 명씩 모이는 교회에 다녀야 하고,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아야 하고, 또 사회적으로도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거나, 다수의 여론에 합당한 사람이어야 하는 사람이 하는 성경 이야기라야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살펴보면 돌밭의 돌과 같이 사람이 가진 자기 기준이라는 것이 모두 앞서 열거한 것 중의 어느 하나의 뿌리를 가지고 있고, 가시와 같이 사람이 가진 염려라는 것이 또한 앞서 열거한 중에서 자신이 꿈꾸는데 되지 않을까 염려하거나, 아니면 그런 기준 앞에서 패배자와 죄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복음을 온전히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누누이 밝힌 바와 같이 목사도 장로도 쥐뿔도 아닙니다. 신학교는 소풍이나 놀러나 갔지 수업이라곤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또 교회에도 잘 가지 않고 오히려 신학도 하지 않는 주제에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예전엔 학업도 생업도 뒤로 하고 다녔지만)


그러나 이런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자기 잘난 맛에 글 쓰는 것과 같이 보이는 이 블로그의 글들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위로 올라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내려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사람들이 위로 가려는 마음과 눈을 가지고 있어서 가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블로그에서는 내려가면 보일 것이라고 늘 말합니다. 돌아서면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낮은 방향으로 가셔서 그리스도가 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위로 가서, 또 세상의 기준을 만족해야 복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생각으로는 좋은 밭이 될 수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의 기준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 그것으로 시작하고 그 시작 이후에 자신 안에서 확신하게 되는 것, 그것을 따라 나서야 좋은 밭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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