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훈련, 신앙훈련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1. 2. 17:05 Writer : 김홍덕

지금 저의 블로그에는 로마서 강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로마서 앞부분에 있는 행위와 믿음에 관한 말씀을 이야기함에 있어 부각되지 않을 수 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젠 습관처럼 된 <신앙훈련>이라는 것이 행위와 믿음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야할 것 같아서 따로 이렇게 설명하려 합니다.



훈련으로 종(種)을 바꿀 수는 없다.



많은 교회와 신앙단체가 신앙에 대한 훈련을 합니다. 이름도 가지각색이고, 최근 들어서는 영어로 훈련 이름을 만들고서는 그 영어 단어의 첫 글자만 따서 약칭을 부르는 것도 많아서 설명을 듣지 않으면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한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요즘 성황 중인 이단 신천지에서도 많은 성경공부와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훈련, 영성훈련(이하 ‘신앙훈련’이라고 하겠습니다.)에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훈련>이라는 단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범위입니다. 흔한 표현이 아니라서 설명을 붙인다면, 훈련이라는 것이 (생명의) 종(種)을 바꾸어내지는 못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신앙훈련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명이 산 자와 같은 생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개를 훈련시키면 고양이나 다른 동물이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쩌다 개를 훈련해서 개가 고양이 흉내를 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흉내’고 ‘노릇’인 것입니다. ‘노릇’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유대인들에게 ‘선지자 노릇’한다고 하신 것을 생각하면 익숙한 표현일 것입니다.


훈련이란 어디까지나 이미 태어난 생명의 본성 안에서 그 생명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지 훈련을 통해서 다른 종으로 바뀌거나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훈련을 통해서 더 좋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맞겠지만 신앙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밝음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공로와 소유를 드리므로 이 세상을 살 동안 안위와 복을 받는 것으로 관철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제 아무리 신앙훈련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거나 구원을 받은 생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훈련은 살아 있는 생명이 받는 것.



또 하나 이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에게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훈련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생명체>에 사용하는 말이고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기계는 시운전, 업그레이드와 같은 말과 개념을 적용하지 기계를 ‘훈련시킨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신앙훈련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다 생명이 있지 그럼 죽은 사람이 훈련을 받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 숨 쉬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서 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한다고 또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고 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고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창세기에 말씀하신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된다는 것, 그래서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그런 축복을 받으려면 성경을 행동으로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신앙훈련을 통해서 성경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전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 아니라 세상의 왕이 되어서 아직도 육신이 죽지도 않고 살아 계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서 돌아 가셨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정말로 지금까지 살아 계셔서 지난 수천 년의 역사 편찬에 정보도 주시고 또 전쟁도 막고 하셨으면 되지 그만한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리석고 하나님을 뜻을 전혀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만이 생명이 있고, 훈련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전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담보받기 위하여 행동을 고치는 것을 신앙훈련이라 여겨서 성경을 읽고 수련하고 훈련하는 것은 주소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없는 존재니 의미가 없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의 존재가 훈련한다고 살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훈련은 종을 바꿀 수 없으니 말입니다.



훈련이 있으려면 먼저 생명으로 거듭나야…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훈련이 급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살았다 하는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훈련이라는 것이 생명에 적용하는 개념이듯 거듭남 역시 생명, 곧 어떤 세계에 있어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하려면 앞에서 이야기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그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이김의 법으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자기 삶의 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밑에 있던 백부장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고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백부장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백부장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는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즉 다른 생명, 거듭난 생명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부장은 어떻게 그런 안목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된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안에 심겨졌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에 따라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려고 시험 잘 치게 해 달라, 좋은 직장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몸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훈련을 받을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히 실패해서 버린 돌과 같은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지금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모습이 우리 심령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법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처음이고, 그 법으로만 생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이 된 다음에 그 생명의 풍성함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묵상도, 기도도, 훈련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훈련이 훈련다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