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3:13-17 세례를 받으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태복음 Date : 2015. 3. 14. 10:25 Writer : 김홍덕

◯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이 있는 광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다. 세례라는 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보이지만 정확히는 신앙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신앙 고백의 증거로 의식에 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즉 세례냐 침례냐 하는 것으로 종파가 나뉜다는 것 자체가 세례의 의미를 모른다는 의미가 된다.


세례의 원어는 '밥티스마(물에 잠기다)'라는 말이다. 그 뜻은 물에 잠긴다는 것이다. 이 세례는 노아 홍수의 예표요 상징이다.(벧전 3장) 즉 노아의 홍수가 죄를 멸하는 물을 거치고 나오는 것이듯 세례도 죄를 씻고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례는, 아니 노아 홍수는 어떤 죄에서 사람들을 구원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아의 홍수가 시작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고 위대한 자 네피림을 낳은 것(창 6장)'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홍수는 하늘 위의 물과 땅 속의 물이 합해져서 홍수가 되었다. 즉 한 마디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혼합하는 죄로 인하여 물이 넘쳐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목마른 존재인데 물이 넘쳐남으로 오히려 다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존재 이유와 삶의 의미에 대하여 알기를 원한다. 즉 그것에 대하여 목마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와서 마시면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요 4장)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시는 분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어쨌든 사람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채우려 무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곧 하늘 위의 물과, 또 사람이 만든 각종 지식인 땅의 물을 합하여 홍수처럼 넘쳐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의 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계속 유입하고 과학은 또 창조과학회다 뭐다 하면서 과학으로 성경을 풀어보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는 등 사람의 존재 목적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 모든 것을 다 도입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아 홍수 때와 지금이 같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성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이 맞는 말이다.


바로 그 물에서 살아 나온 것이 노아의 방주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그 물, 곧 세상에 넘쳐나는 말씀들에서 나오는 것이 세례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뒤 섞이고 홍수처럼 범람하는 물  속에서는 나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고, 그러므로 그 안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바로 세례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세례를 아무리 거룩한 예식으로 치르고 세례 증서를 금으로 발급한다 해도 세례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세례는 신앙 고백이다. 어떤 신앙 고백이냐 하면 세상에 홍수처럼 넘쳐나는 지식과 이론과 또 말씀 안에서는 내가 살 수 없고, 또 그것이 내가 마실 물이 아니라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물은 말씀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십계명을 받은 모세는 모세라는 이름이 '물에서 건진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생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 물이나 마시지 않고 하수도의 물과 섞이지 않는 상수(上水)(도)의 물을 먹는 것과 같이 세상의 지식(땅에서 나는 물)과 섞이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라야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 고백을 하는 것이 세례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기 안에 이와 같은 고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이스라엘 백성들을 히브리인이라고도 한다. 히브리인이란 '큰물을 건넌 자'라는 의미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와 요단강이라는 큰물을 두 번 건너서 가나안 땅에 정착한 민족이라서 그렇다. 히브리인 즉 하나님의 백성은 두 번의 세례를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두 번은 물세례와 불세례(성령 세례)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시자 하늘에서 비둘기 같이 성령이 그 위에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17)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예수님이라서 그렇다!"라는 관점으로 보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오셨고, 또 '나를 따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의 모든 행적은 예수님이라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고, 일어날 일이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기에 보이신 것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 곧 이 세상에 넘치는 물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한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세례로 보여주신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세례의 의미를 한 번 더 이야기하고 가는 것이다. 세례는 절대로 의식이 아니다. 이제부터 교인이 되겠다는 증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어떤 것으로 그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물속에서 살 수 없듯이.


사람이 이 세상의 지식과 이 세상의 가치관을 자기의 것으로 삼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은 마치 육신이 물속에 잠긴 것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살 수 없다고 그 밖으로 나오는 것 그것이 세례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과 기뻐하는 자가 되는 신앙 고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십자가와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살려 둘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십자가에 처형이 되는 것이나, 물속에서 사람이 죽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요 무엇보다 죽을 죄인이 아니라 그 모습이 바로 살았다 할 수 있는 온전한 생명이시기에 살리심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것과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물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세례는 같은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이고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역시 같은 것이고 같은 법이다.


◯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세례를 보는 관점이 되어야 한다. 세례가 물에 들어갔다 오는 침례가 온전한 것이냐 아니면 시대적인 상황을 반영하여 머리에 물을 뿌리는 것이면 되느냐 하는 것으로 다투고 급기야 종파가 나뉘는 것과 같은 그런 시각으로 세례를 보는 것이 아니다. 즉 세례의 가치가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으로 세례를 천 번 받아도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 이 세상에 넘쳐나는 가치관에서는 나는 살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고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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