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셋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땅이 드러나게 하신다. 천하의 물, 곧 하늘 아래의 모든 물, 즉 궁창 아래의 모든 물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셔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해수면 위에 있는 모든 땅의 체적보다 해수면 아래의 체적이 더 크다고 한다. 즉 지구는 바다 위의 모든 땅을 다 바다 안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물을 다 한곳으로 모아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이 창세기의 말씀 곧 천지가 창조되는 과정은 단순히 물리적인 세상의 기원을 밝히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누차 이야기해 가고 있다. 지금 이 천지창조는 세상의 창조과정을 통하여 흙으로 지으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하늘이나 바다나 땅과 같은 세계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태어남이 없었다면 세상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에게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물이 어디로 모이고 땅이 드러나고 하는 모든 것이 어디를 지향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천지창조 과정이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물을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누셨다. 이는 혼돈하는 땅과 같은 사람(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으니 땅은 사람을 말함)의 공허함에 대한 갈증, 즉 자기 정체성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하여 물을 마셔야 하는데, 물은 상수가 있고 하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하수도의 물을 마시고 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해갈하는 것에 대하여 하늘 아래, 즉 세상의 온갖 지식으로는 사람의 정체성이 해갈되지 않는다는 것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심으로 말씀하셨다. 그리고 셋째 날에는 이 궁창 아래의 모든 물을 한 곳으로 모으셨다고 했다. 즉 사람이 그 정체성을 해갈하기 위하여 마셔서는 안 되는 세상의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한 곳으로 모으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물을 하나로 모으신 것에는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물을 모아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것 보다는 땅이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땅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즉 이 말씀은 세상의 모든 이론과 지식 가운데서 사람이 드러나게 하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을 종교적인 예식으로 가져온다면 그것은 세례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셋째 날의 창조는 물을 모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땅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다. 즉 사람이 궁창 아래의 물, 곧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의 갈증을 해갈하기 위하여 취하는 모든 세상의 지식들인 궁창 아래의 물에 매몰되지 않고 물 위로 드러나게 하시기 위하여 하늘 아래의 물을 모으시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허무함을 느끼고 또한 그것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이 안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례와 같다. 세례는 밥티스마(Baptisma)라고 하는데 이는 ‘물에 잠기다’는 의미이다. 왜 사람을 물에 잠그는가 하면, 사람이 물 속에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즉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사람이 세상이 추구하는 각종 위대함을 좇는 지식과 종교와 규례 안에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인생은 허무하다고 한다. 많은 경우 세상에서 높은 정신적 세계를 이룬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그들이 추구한 모든 것이 다 하늘 아래의 물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들이 돈을 벌어 자신을 만족시켜 보려 하고, 또 공부를 많이 하면 자신의 갈증이 해갈될 것 같아서 그렇게 하고, 또 때로는 종교적인 규범을 행동으로 지켜 행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보면 그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의 모든 물을 다 한 곳으로 모으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기 때문이다. 땅이 드러났다는 것은 사람이 궁창 아래의 물 속에서는 살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궁창 아래의 물과 같은 철학과 종교와 황금을 하염없이 마시려 하고 또 마신다.


그러나 그 결국은 다 물에서 땅이 드러나듯, 궁창 아래의 물을 마시던 사람들은 결국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땅이 물 위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세상의 물, 궁창 아래의 물을 먹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니 사람은 그런 존재라는 것이다.


지금 이 천지창조의 과정은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안식할 수 있는 관계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한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해서, 다시 말해서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서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심으로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사물을 구분하듯 자신의 정체성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된다는 것이 첫째 날의 창조 과정이고,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실 물과 마셔서는 안 되는 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그 둘째 날의 말씀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된 사람은 궁창 아래의 물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지식 가운데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고백은 인생은 세상의 것을 취하여 살 수 없는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이라는 것을 물에서 땅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것, 궁창 아래의 물은 무엇인가? 그것에 대하여는 넷째 날에 말씀하고 계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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